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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 쿠바와 북한, 제재의 역설

입력
2014.12.0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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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반세기 제재 쿠바 변화 못 시켜

명분에 얽매여 스스로 발목을 잡은 꼴

北을 협상으로 이끌어내는 결단 필요해

유엔총회는 지난 10월 28일 미국의 대(對)쿠바 경제제재 해제 촉구 결의안을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총회 참석 193개 회원국 가운데 찬성 188, 반대 2, 기권 3표. 반대는 미국 자신과 이스라엘이고, 기권 3개국은 남태평양 작은 섬나라 미크로네시아, 마셜군도, 팔라우뿐이다. 이스라엘은 유엔총회에서 반 이스라엘 결의안에 항상 반대표를 던지는 미국에 보은해야 할 처지이고, 기권한 세 나라는 미국에 외교와 경제를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그러고 보면 사실상 전 세계가 한 목소리로 미국의 쿠바 경제제재 해제를 촉구하는 셈이다.

미국이 쿠바에 대해 50년 넘게 지속하고 있는 경제제재를 해제하라는 유엔총회의 결의안 가결은 올해로 23년 째다. 그래도 미국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공화, 민주당 정부가 따로 없다. 오바마 정부 들어 쿠바계 미국인들의 방문과 송금제한 해제 등 일부 완화조치가 있었으나 제재의 큰 줄기는 그대로다. 미국이 내세워온 제재 명분은 쿠바 민권과 인권 향상이다. 자유선거와 정치범 석방, 인권이 증진되어야만 제재를 해제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반 세기 넘게 지속된 미국의 경제제재가 쿠바의 정치제도와 주민 인권상황을 얼마나 향상시켰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제재의 고통은 애꿎은 일반주민들의 몫이었고, 굶주림 등 열악한 생존조건을 피해 미국으로 밀항을 시도하다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치적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는 미국으로서는 사회주의혁명 이후의 쿠바 상황에 대해 방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기에 과감히 제재를 풀고 인적 왕래와 무역 등을 자유롭게 했다면 과연 쿠바의 사회주의체제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을까. 쿠바의 체제 유지의 1등 공신은 결국 미국 정부인 셈이다.

명분에 입각한 제재조치가 제재 대상국의 변화를 가로 막는 것은 기막힌 제재의 역설이다. 미국의 쿠바 제재 상황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5ㆍ24 조치를 비슷한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유엔총회 제3위원회의의 북한 인권결의안 통과도 명분이야 그 누구도 반대하기 어렵지만 궁극적으로 북한의 인권상황 개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김정은 정권이 이를 계기로 외부로 향한 문을 한층 닫아 건다면 오히려 북한 주민들의 인권은 더욱 열악해질 게 뻔하다.

북한의 근본적 인권문제는 집단주의와 수령1인 지배라는 체제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크다. 따라서 북한의 인권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할 경우 바로 그 체제를 부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다. 북한 정권의 격렬한 반대와 지금 북한 전역에서 벌어지는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반대 군중집회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김정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이 성립하기 어렵다.

국제적 공조를 통한 압박 강화로 북한 체제를 무너뜨려서 해결하자는 견해가 있지만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인도적 참사가 발생한다면 가서는 안 될 길이다. 결국 인권 문제든 핵 문제든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북 정권을 대화의 자리로 이끌어 내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해 내놓은 다양한 구상과 통일대박론도 남북이 마주 앉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명분과 선결조건에 지나치게 얽매이면 일이 안 된다. 결과적으로 스스로 발목을 묶는 족쇄가 될 뿐이다. 북한인권 문제는 중요한 명분이지만 대화와 협상을 통해 체제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체제의 속성에서 비롯된 인권문제는 풀지 못한다. 핵 문제의 궁극적 해결 역시 대화를 통한 교류협력과 공존의 틀 속에서 풀어갈 때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지금처럼 김정은 체제를 인정한다는 것인지 안 한다는 것인지 불분명한 혼란한 신호를 계속 보내서는 진정한 대화의 장이 마련될 수 없다. 박 대통령이 진심으로 남북관계를 변화시킬 의지가 있다면 김정은 체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통일준비위원회가 마련 중인 통일헌장에도 상대를 인정하는 공존의 진정성이 담겨야 한다.

논설위원 wkslee@hk.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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