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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한여름 100일의 꽃그늘

입력
2017.07.1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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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에는 대나무와 배롱나무를 가까이에 심는 일이 있다. 둘 다 남녘에서 자라는 나무이니 유년의 어떤 기억들을 이곳 경기 북부에서 나무로 실체화하고 싶은 욕심일 것이다. 따듯한 겨울바람까지 여기로 옮겨올 수는 없는 일인데도 말이다.

고향집 뒤는 조그만 대밭이다. 사시사철 푸르름의 기상이 몸에 배였다. 한겨울 밤 북풍에 푸른 댓잎이 서로 부딪쳐 내는 오묘한 운율 속에서 자랐다. 원시적인 태고의 음향이었거나 더 큰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비밀신호였는지도 모른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시누대로 방패연을 만들어 주었다. 한겨울 언덕에 올라 연을 날렸다. 언덕 너머로 꿈을 날렸다. 바람을 품은 연이 올라가는 높이의 하늘이 내가 처음 만져본 하늘이었다.

출판사를 시작하고 한두 해 지나 종로 1번지에 문을 연 교보문고의 1층 넓고 높은 로비에 왕대나무밭이 생겼다. 초현대식 교보빌딩에 이런 원시의 녹색공간을 만든 신용호 창립자의 마음 속에 고향의 대밭처럼 해마다 희망의 죽순이 솟았을 것이다. 자신만이 아는 마음의 평화를 만든 신의 한 수가 부러웠다. 이런 공간을 욕망하기 시작한 지 20년이 지나 파주에 사옥을 지으면서 건물 안에 마련한 반(半)유리온실 속에 하늘로 치솟는 자그만 대밭을 만들어 가슴에 품었다.

한여름의 꽃그늘은 귀하다. 녹색이 사나워지는 뜨거운 여름, 그 100일 동안 피고지고를 계속하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들이 화사한 충격을 준다. 무궁화꽃도 여름을 함께 한다. 나무처럼 늙고 싶으면 나무처럼 살아야 한다. 무더운 여름도 나무처럼 견뎌야 한다. 배롱나무의 꽃그늘은 하늘이 준 선물이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인지 요즘에는 서울에 상륙한 배롱나무를 자주 마주친다. 22m의 움직이는 거대조형물 ‘망치질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광화문 흥국생명빌딩 뒷편의 아름다운 배롱나무들을 만나는 행복이 있다. 지나칠 때마다 고향길 가로수로도 심은 나무들이 반갑기도 하고, 이 나무를 정성스럽게 가꾸는 건축주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다.

임진왜란 때 최대의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 의병장 집안 장흥 고택의 연못가를 두른 오래된 배롱나무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소풍 길에서 처음 마주친 무릉도원이었지 싶다. 안동 병산서원의 4백 년 가까이 잘 자란 배롱나무의 기품이 새롭다. 한 없이 그 품에 안기고 싶었던 담양 명옥헌 원림(園林)의 3백 년 넘는 배롱나무 군락의 꽃대궐은 이제 국가명승의 화관을 썼다. 수목원에 그 남도의 배롱나무를 품고 싶었지만, 경기 북부의 추위를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아 마음 속에만 두었다. 그 안타까움을 흔한 싸리나무 꽃으로 대신해야 했다. 작고 몽롱한 싸리꽃으로는 한여름 땡볕과 정면승부하며 더욱 화사해지는 배롱나무꽃에 대한 그리움을 가릴 수 없었다.

지난 가을 이곳과 비슷하게 추운 양평에서 묘목부터 5년을 키웠다는 배롱나무 55그루를 어렵게 구해 수목원 작은 호숫가에 심었다.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겨울나기를 위해 몸통과 줄기를 베로 감고 비닐로 덮었다. 한겨울 외롭게 비닐막을 뒤집어 쓴 초병(哨兵)처럼 찬바람을 이겨냈다. 초조하게 봄날 새싹을 기다렸다. 조그만 꿈일지라도 기다림을 이겨낼 자신이 없고서는 함부로 시도할 일이 아니다. 그것이 생명에 관한 일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배롱나무의 새순도 대추나무처럼 늦는 모양인지 봄날이 다 가고서야 새 잎을 세상에 내보였다. 반갑고 기뻤다. 이제 참새 혓바닥 같은 여린 잎에서 벌써 화사한 붉은 꽃을 상상한다. 한두 해 비닐막 속의 겨울을 지나고 그 다음 해가 되면 호숫가 배롱나무의 작은 꽃궁궐에 파묻힌 나를 발견할 것이다. 작은 꿈이라도 꾸는 자가 창조한다.

조상호 나남출판ㆍ나남수목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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