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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이 땅의 재즈 역사

입력
2017.08.02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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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황순원의 장편소설 ‘일월’(문학과지성사,1990 재판)에 나오는 한 대목부터 인용한다. “인철은 계단을 내려 지하실 다방 몽파르나스로 들어섰다. 바깥 빛에 있던 눈이라 다방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의 음향만이 귀에 또렷했다.” 이 작품은 1962년 1월부터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다. 대낮부터 전파를 탔던 저 재즈 아티스트는 누구였을까. 출간 훨씬 전에 써 놓은 글을 뒤늦게 모은 게 분명한 최인훈의 에세이집 ‘역사와 상상력’(민음사, 1976)에도 “삼류극장에서 들려오는 소란한 재즈”가 나온다.

1990년대 초에 한국 최초의 재즈 붐이 있었다지만, 한국에 재즈가 상륙한 역사는 꽤 깊다. 재즈송(jazz song)은 일본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트로트, 전통가요를 대중가요화했던 신민요, 일종의 코믹송(comic song)에 해당하는 만요(漫謠)와 함께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네 가지 대중가요 장르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이 때의 재즈송은 외연이 무척 넓어서 재즈만 아니라 미국에서 대중적으로 유행한 모든 음악과 샹송ㆍ라틴 음악 등을 두루 가리켰고, 그러한 분위기를 모방하여 만든 우리나라 대중음악도 재즈송으로 불렸다.

장유정의 ‘근대 대중가요의 지속과 변모’(소명출판, 2012)에 따르면 광복 이전에 발매된 유성기 음반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재즈송은 132곡으로, 1935년부터 1937년 사이에 가장 많이 발매되었다. 이 시기는 1920년대 말부터 도시를 중심으로 출현한 도시 정서의 발달과 함께 조선의 음반 산업이 가장 활기를 띠었던 때다. 그러나 아쉽게도 132곡 중에서 가사를 찾을 수 있는 곡은 49곡 정도이며, 음원까지 있는 곡은 24곡뿐이다. 최근에 출간된 박성건의 ‘한국 재즈 음반의 재발견’(스코어, 2017)에 1936~1939년 사이에 발매된 재즈 유성기 음반(일명 SP)이 겨우 세 장밖에 소개되지 못한 것도, 이 시대의 음반 자료 발굴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49곡의 재즈송 가사를 당대의 트로트 가사와 비교해보는 일은 흥미롭다. 우선 재즈송에서는 제목과 가사에 빈번하게 외래어가 사용되었다. 또 재즈송에 등장하는 공간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국의 낙원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국 여성에 대한 남성 화자의 노골적인 동경과 환상을 드러낸다. 이처럼 향락지향적인 재즈송의 성격은 결핍과 상실의 정조로 가득한 당대의 트로트 가사와 뚜렷이 구별된다. 재즈송은 도시를 거점으로 청춘에 소구했던 반면, 트로트는 좀 더 넓은 공간과 연령에 다가갔다. 재즈송에 만연한 이국정서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는 해방의 효과가 있었지만, 그만큼 작위적이라는 의심도 함께 불러 일으켰다. 조증(躁症)의 재즈송은 동시대의 핍진한 삶을 묘사했던 울증(鬱症)의 트로트에 비해 공감 능력이 떨어졌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재즈 음악은 적성국의 음악이 되었고, 1940년 8월부터 재즈 음악은 방송과 녹음이 금지됐다. 재즈는 해방이 되면서 미군과 함께 이 땅에 다시 돌아 왔다. 해방 정국의 혼란과 뒤이은 한국전쟁 역시 트로트의 공간이었지 재즈에 틈을 주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무수한 트로트 명곡을 남겼으나, 재즈는 그 공간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비록 거품이기는 했지만, 온 국민이 민주화와 산업화에 매진한 끝에 비로소 한국 최초의 재즈 붐이 일었다.

한때 재즈를 금지했던 일본은 현재 세계가 인정하는 재즈 시장이다. 미국을 제외한다면 세계의 재즈 연주가들이 가장 많이 연주회를 하는 곳도 일본이고, 음반 발매와 판매도 활발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달리 재즈를 유별나게 취급하지 않았던 무라카미 류는 어느 소설에서 “일본에 재즈가 넘쳐나는 것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베트남처럼 미국에 이긴 나라에서는 재즈 따위를 듣지 않는다”고 야유했다. 50ㆍ60년대 한국 소설에서 재즈라는 낱말을 찾는 것은 쉽지만, 제대로 된 재즈론(論)은 보기 어렵다. 그나마 남정현이 1963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현장’을 통해서 한국 지식인의 재즈론을 엿볼 수 있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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