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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살불살조 화두 붙든 이정현

입력
2016.09.0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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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살불살조 화두 붙든 이정현

취임 일성으로 “서번트(섬김) 리더십으로 당을 수술하겠다”고 했던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요새 틈만 나면 민생 현장을 누비고 다닌다. 언론에 알리지 않고 대변인이나 수행비서 없이 혼자 조용히 다녀오는 경우도 많다. 보여주기 식 현장 행사는 가급적 줄이겠다는 취지다.

당 대표 동선을 민생과 현장 위주로 확 바꾼 뒤로 당 사무처 수행원팀은 여유가 생겼지만 당 정책위원회는 가장 힘들어졌다고 한다. 대표가 민생 현장과 당 정책을 연결하기 위해 새벽과 밤에도 수시로 당정회의를 열고, 관련 법안 상황을 챙기기 때문이다. 대표가 정책위의장이나 주요 당직자에게 전화를 걸어 “의장님, 저 정현입니다” 식으로 깍듯이 인사한 뒤 이것저것 지시사항을 늘어놓으면 토를 달기도 쉽지 않다. 이 대표는 지금도 검은색 폴더형 2G 휴대폰을 사용한다. 개발시대 재벌 회장들이 무전기를 쥔 채 공사 현장을 진두지휘했듯, 이 구닥다리 휴대폰을 들고 그는 민생 현장에서 전투를 치른다.

지난달 31일 폭우 피해를 입은 울릉도 상황을 챙길 때도 그랬다. 국회에서 추경안 처리가 무산된 이날 그는 당 대표실로 돌아와 울릉군수를 연결해 애로사항을 받아 적더니, 불과 10분 만에 행정자치부, 국방부, 국민안전처 등 3개 부처 장관에게 지원을 부탁하는 전화를 일일이 돌렸다. 이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안 가 울릉도에는 8억원의 특별교부세가 내려갔다. 당 외부에서 모셔와 꾸린 혁신비상대책위원회가 무기력한 모습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그렇듯 이정현의 정치 행로는 기존의 문법과는 확실히 다르다. 호남 출신으로 사상 처음 보수정당 대표가 된 그는 국회의원 비서를 시작으로 17단계를 거쳐 그 자리에 올라갔다. 잘만 하면 ‘이정현’은 정치사에 비주류 성공신화로 새겨질 수 있는 상품이다. 어제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도 그는 “청년ㆍ미래세대에게 저처럼 무수저도, 비엘리트도 비주류도 집권여당 당 대표가 되고 주류가 될 수 있음을 꼭 보여주고 싶다”고 외쳤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오른쪽)가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한 식당에서 생일을 이틀 앞두고 이정현 대표와 함께 케이크 촛불을 끄고 있다. 왼쪽은 조원진 의원. 정진석 페이스북 캡처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오른쪽)가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한 식당에서 생일을 이틀 앞두고 이정현 대표와 함께 케이크 촛불을 끄고 있다. 왼쪽은 조원진 의원. 정진석 페이스북 캡처

하지만 다른 한 축에는 ‘박근혜의 복심’ ‘친박 대리인’이라는 굴레가 있다. 지난 8ㆍ9 전당대회에서 초반 대세론을 구가한 이주영 후보가 친박계 심판론을 제기하고, 친박 실세 최경환ㆍ서청원 출마 카드마저 무산되자 위기감을 느낀 친박계가 다급하게 찾아간 것이 이정현 후보였다. 당시는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 KBS 세월호 보도개입 녹취록 공개 파문으로 휘청대고 있었을 때지만, 친박계는 ‘적어도 이정현은 박근혜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게다. 이후 이 대표가 전대 당일 “모두가 ‘근본 없는 놈’이라고 등 뒤에서 비웃을 때도 저 같은 사람을 발탁해준 박근혜 대통령에게 감사함을 갖고 있다”는 말로 화답했을 때 양측의 정치적 거래는 견고하게 완성됐다는 게 세간의 시각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머슴’을 자처하며 밑바닥에서 고군분투해도 ‘친박 대리인’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당장 ‘우병우 사태에 대해 왜 침묵하느냐’는 질문세례가 그에게 쏟아지고 있다. “벼가 익고 과일이 익는 데는 보이지 않는 바람도 작용을 한다”고 응수했지만 당내에는 “그 말씀하시기 좋아하는 분이...”라는 비아냥이 더 많다. 친박계도 그의 지휘권을 명실상부 인정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비주류 성공신화를 쓰기 위해선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 셈이다.

살불살조(殺佛殺祖). 당나라 고승 임제 선사가 했다는 이 말은 진정한 깨침으로 나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부처도 조사(祖師)도 죽이라는 뜻이다. 전대에서 경쟁자였던 주호영 의원이 건넸다는 이 화두에 공감한다. 이 대표는 전대에서 자신에게 몰표를 던진 친박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낡은 2G 휴대폰으로 정책위의장, 군수, 장관에게 하듯 청와대에 전화를 걸어 맘껏 쓴소리를 할 수 있을까. 그 선택이 자못 궁금하지만, 청와대와 수직적 당청관계를 깨는 게, 민심을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게 집권여당 대표의 가장 중요한 소임임을 떠올리면 좌고우면 할 이유는 없다.

김영화 정치부 차장 yaa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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