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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등록 : 2016.03.17 13:53

[김월회 칼럼] 누구의 귀를 잡아당길 것인가

등록 : 2016.03.17 13:53

옛날 군주에게 사적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무릇 하늘을 닮아야 했다.

하늘이 오로지 공적인 것처럼 군주도 공적이어야만 했다. 하여 오랜 옛날부터 군주 곁엔 늘 사관이 붙어 그의 언행을 낱낱이 기록했다. 군주의 모든 일상이 공적이기에 응당 역사로 저장돼야 했음이다.

그래서 공사(公私)의 공은 제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제후는 천자로부터 일정 지역의 통치를 위임 받은, 해당 지역의 실질적 군주였다. 공(公)은 그런 제후를 지시하는 공식 호칭으로, 고대 중국인들은 이를 가져다가 사(私)의 반대말로 사용했다. 군주 자체를 공이라고 여긴 결과였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군주는 공사를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개념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적 영역을 인정치 않았기에 공사를 구분할 계기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이러했다.

3,000년쯤 전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천자의 나라는 주(周)였고 천자는 성왕이었다. 다만 그는 아직 어렸던 지라 그의 숙부였던 주공이 천하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하루는 성왕이 동생을 당(唐) 지역의 제후로 봉한다고 했다. 후원서 노닐다가 오동잎 하나 따주며 불쑥 내뱉었던 농담이었다. ‘제후 봉하기 놀이’를 한 셈이었다. 그런데 주공은 정말로 그 동생을 당의 제후로 봉했다. 화들짝 놀란 어린 성왕은 주공에게 장난친 거라며 해명하였다. 그러나 주공은 단호했다. 군주에게 농담은 없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한 번 말하면 말한 그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공은, 천자가 말을 바꾸면 공의 권위가 서지 못한다고 본 셈이었다. 더구나 군주의 일상은 온통 공적이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군주가 농담이니 뭐니 하며 말을 바꾼다면, 결국 공이 한결같지 못하여 이랬다저랬다 한 꼴이 된다. 공의 권위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주공이 농담인줄 빤히 알면서도, 또 어린 자를 제후로 봉함이 현실적으론 큰 손실임을 알면서도 성왕의 말을 그대로 행한 까닭이다.

말뿐이 아니었다. 군주는 모든 행동거지가 한결같을 것을 요구 받았다. 군주답고자 했던 이는 이로써 스스로를 단련하기도 했다. 위 무공은 그런 군주의 대표 격이었다. 그는, 자신이 혼용무도(昏庸無道)한 군주가 될까 하여 자신을 훈계하는 노래를 지어 주변 사람들로 늘 부르게 하였다. ‘시경’에 전하는 그 노래의 일부를 들어보자.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되는대로 말하며 누가 내 혀를 멈추겠는가 하지 말라. (중략) 아아, 젊은 도령아. 아직도 옳고 그름을 모르는가. 손을 잡아 끌어 일을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얼굴을 맞대고 일러줬을 뿐 아니라 귀를 잡아당기면서까지 알려주지 않았는가.”

이 노래에서 위 무공은 자신을 손을 잡아 끌고 얼굴을 맞대며 귀를 끌어당겨 가르쳐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군주로 설정했다. 심지어 스스로를 철부지 젊은 도령에 빗대기까지 했다. 그럼으로써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에 ‘임금 놀이’나 하는, 그런 함량 미달의 군주가 되진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저 서너 마디 시늉만 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 120구에 걸쳐, 거친 언사도 마다 않고 군주가 경계해야 할 바를 구구절절이 지적했다.

지금으로부터 2,700여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기록에 의하면 위 무왕은 괜찮은 군주였다. 무너진 주 왕실을 복구하는 등 공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이를 위 무공이 행한 고도의 정치 쇼로 읽을 수도 있다. 사실 군주가 시켰다고 하여 그를 강하게 훈계하는 노래를 늘 부른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 쇼였다고 해도 이는 기릴 만한 일이지 싶다. 틈만 나면 국회를 윽박지르고 시민을 훈계하는 모습을 보느니 이런 쇼를 보는 게 훨씬 나을 듯해서다. 그래도 이 노래엔, 군주는 사적 영역으로부터 간섭 받아선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아니 군주는 공적 가치에 맞춰 사적 욕망을 없앨 줄 알아야 한다고 요구 받는다. 만일 군주가 사적 이해관계로 국법을 대놓고 파괴하며 공적 영역을 허물면, 그 귀를 잡아당겨서라도 잘못을 고쳐줘야 한다고 노래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잡다한 ‘갑’들의 귀를 잡아당겨 가르치자는 얘기가 아니다. 민주주의사회의 시민은 주권자로서 잘못된 길을 가는 위정자를 가르칠 의무를 지닌다. 그래서 불통과 무능 소리를 꾸준히 들어온 대통령의 귀를 끌어당겨 가르치려 했다고 치자.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나라의 지도자보다는 한 정파의 보스다운 길을 의연하게 걷고 있으니 말이다. 선거 때뿐 아니라 임기 내내 오로지 득표의 유불리만 따지는 정치인들은 또 어떠하겠는가. 난망한 일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은 비유컨대 모두가 다 군주이다. 민주주의가 꽤 무너졌다고 해도 적어도 투표를 할 때만큼은 그러하다. 하여 우리 자신의 귀를 잡아 끌어 스스로를 가르치는 게 그나마 나을 수 있다. 투표장에서만큼은 사적 판단이 아닌 공적 판단을 앞세울 줄 알도록 말이다.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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