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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힐링의 시대에는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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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힐링의 시대에는 희망이 없다

입력
2018.03.27 15:2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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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 자꾸 뒤처지는 것 같아요… 저 이대로 괜찮을까요?” 상담용 노트북을 잠시 닫고, 물을 한잔 들이켰다. 마음이 무겁다. 벌써 2만명째 만나는 고민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로 고민을 호소한 청년 내담자의 수가 3만2,000명을 돌파했다. 이들의 고민을 빅데이터로 분석해 본 결과, 전체 내담자의 75%가 ‘뒤처짐’을 느낀다고 호소했다. 전체 상담 건 수의 55.4%가 진로, 취업 문제다. 결국 진로와 취업 고민이 아닌 20%, 그러니까 연애나 가족관계 문제로 상담을 해온 이들마저 뒤처짐의 감각을 호소한다.

“남자 친구가 그렇게 떠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그에게 신경을 쏟느라 해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이제 혼자인데 친구들을 보면 연애도 잘만 하고, 자기 할 일도 잘만 하면서 앞으로 나가고 있더라고요. 연애에 모든 걸 쏟아 부어 버리느라… 해 놓은 것, 경험한 것도 하나도 없으니 이렇게 뒤처지는 모습을 보는 게 서러워요.”

“엄마의 우울증을 케어하면서 점점 지쳐 갔어요. 학교 다녀와서 아르바이트 하고 나면 엄마 옆에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했거든요. 다들 대외활동이나 워킹 홀리데이, 인턴 같은 걸 하는데, 저만 이렇게 뒤처지고 있는 거 같아 불안해요. 가끔은 엄마가 미울 때도 있고요.”

대학생활, 가족관계, 연애… 어떤 사연으로 시작해도 말미에는 뒤처진다는 이야기를 하는 청년들. 특히나 주목할 점은 2만여명이 모두 나’만’ 뒤처지고 있다고 말하는 점이다. 나도 뒤처지는 게 아니라 나‘만’이다. 이들이 모여 플래시몹을 하면 어떤 풍경일까. 장충체육관 다섯 개를 채울 만큼의 인원이 모여, 모두가 뒤처지면서 뒤로 걷는 모습. 아마 한국 사회 청년들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까.

이토록 비교 평가의 늪에 빠진 청년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까? “비교하지 말고 내 안의 가치를 찾아” 같은 말들은 이들에게 폭력적 상처가 된 지 오래다. 19세가 될 때까지 아이들은 제도권 교육 속에서 경쟁과 비교, 상대평가의 틀에 적응해 왔다. 그런데 , 스무 살이 되는 순간 그들은 술과 담배를 구입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에 맞닥뜨린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이며 글로벌 역량을 갖추고, 화합해야 한다. 기업의 인재상이다. 하지만 창의적이고 도전적이어야 할 이들은 역설적으로 다시 제도권 교육과 유사한 알고리즘으로 평가되고 수용된다.

9년 전 필자가 취준생이던 때 처음 ‘스펙’이라는 말이 생겼다. 토익, 대외 활동, 학점 정도를 갖추면 ‘어느 정도 준비된 녀석’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취업 시장에 진입하는 순간, 필자 또한 뒤처짐의 순례길에 합류해야 한다. 인턴, 자원봉사, 토익, 토익 스피킹, 학생기자단, 대학생 마케터, 학점, 워킹홀리데이, 어학연수, 교환학생… 끝없이 늘어나 버린 스펙. 이제는 더 이상 3종 세트, 7종 세트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세트로 묶을 수 없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무한증식 속에서 청년들은 상대평가를 통해 반드시 본인이 모자란 부분을 하나씩 찾아낼 수밖에 없고, 이내 ‘저만 뒤처지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심지어 그토록 많은 항목을 충족해 내는 비범한 청년도 안심할 수 없다. 기업의 면접 점수에 은밀한 보정이 있어 왔다는 사실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출신학교를 넘어 심지어 성별로도.

모두가 자신의 마음 속 다락방에 갇혀, 나’만’을 말하는 시대. 나’만’빼고 다 잘 달린다지만, 정작 잘 달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환각의 레이스는 누가 만든 걸까? 기성세대는 한걸음 물러난 채 청년에게 힘을 내라 조언하는 힐링의 시대에는 희망이 없다. 우리 모두가 이 문제의 당사자라는 자각이 변화의 첫걸음이 아닐까.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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