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집 50대 “경찰 안 믿어”
“취객이 가게 집기 파손했는데
경찰은 ‘좋게 해결하라’ 말뿐”
수사관 조사 전부터 합의 강권
“억울한 사연 들어주지도 않아”
대질 땐 “왜 고소했냐” 타박
검찰ㆍ경찰ㆍ판사들 관심 안 가져
국민 결국 전관예우 변호사 등 찾아
서울 은평구에서 3년째 치킨집을 운영 중인 김모(57ㆍ여)씨는 취객들이 시비를 걸거나 의자 등 집기를 집어던지며 소란을 피워도 웬만하면 경찰을 찾지 않는다. 한 달 평균 2, 3번씩 겪는 일이지만 신고를 해도 경찰은 대부분 출동해서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참고인으로 경찰 조사를 받기라도 하면 그날 장사를 접어야 하는 게 더 손해다. 김씨는 “경찰이 와서는 ‘그냥 좋게 해결하세요’ ‘장사하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에요?’라는 말만 했다”며 “경찰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변호사 A(34)씨는 형사 사건 수임을 꺼린다. 의뢰인(피의자)이 검찰 조사를 받을 때 검찰의 태도가 너무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검사나 수사관들은 검찰 사건사무규칙을 들먹이며 조사를 받고 있는 의뢰인 옆에 앉지 못하게 하고 조사 중 발언은 물론 메모도 못하게 했다. 변호인이 피의자 신문을 방해하거나 수사기밀 누설 등 수사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을 우려해 변호인의 참여 절차를 제한하는 규정인데, 이를 검찰이 악용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A씨는 “검찰이 수사 편의를 위해 피의자가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심지어 변호인에게 소리를 지르며 내쫓는 등 인격모독이나 다름 없는 일도 많지만 검사나 수사관 심기를 건드리면 사건을 풀기 어려워질 수 있어 꾹 참는다”고 말했다.
정의의 사도 어디로 갔나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최후의 보루인 사법기관. 그러나 국민은 경찰 검찰 법원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대중문화가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국민의 의식을 어느 정도는 반영한다. 출세만 위해 권력 유착을 서슴지 않는 검사를 묘사한 영화들(‘검사외전’ ‘내부자들’)이 최근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수년 전에도 재판의 불공정함을 과장되게 그린 영화(‘부러진 화살’)가 크게 화제가 된 사실은 일반 국민에게 법이 공정하지 않다는 불신이 뿌리깊음을 시사한다. 또 최근 진경준 법무부 출입국관리본부장(검사장)이 일반 투자자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주식 대박’을 치고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돈과 권력이 있는 그들만의 리그”를 새삼스럽게 인식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
이러한 국민의 인식이 근거 없는 오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거나 재판을 받은 경험이 있는 국민일수록 사법기관에 대한 신뢰도가 더 낮다는 조사 결과는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형사정책과 사법제도에 관한 평가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각 사법기관에 대해 신뢰한다는 응답이 경찰 24.9%, 법원 24.2%, 검찰 16.6%에 불과했고, 범죄 피해를 입었거나 재판 경험이 있는 응답자들은 그 수치가 더 낮았다. 조사는 지난해 9~10월 전국의 20세 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과 면접을 통해 실시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해 발간한 ‘한눈에 보는 정부 2015’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27%(2014년 기준)로 조사 대상 42개국 중 39위로 최하위권이었다. 2007년 29%에 비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돈ㆍ권력 있어야 보호 받는다” 인식
수사와 재판을 실제로 겪어본 이들이 사법기관을 더 불신하게 되는 것은 먼저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려 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한다. 가게 집기를 파손한 사람을 고소한 B(34)씨는 검찰 조사가 편파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수사관은 조사 시작 전부터 합의를 강권했다. 대질 신문을 할 때는 “증거도 충분치 않은데 왜 고소를 했냐”고 타박까지 했다. 피고소인에게 “당시 그런 행동을 할 상황이 아니었겠네요?”라고 물어 오히려 그의 변소내용을 정리해줬다. B씨는 “수사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 얘기만 다 들어줬어도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피고소인 측과 아는 사이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지난해 7월 주거침입 혐의로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 20만원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해 정식 재판을 청구한 C씨 역시 판사로부터 “이런 사건으로 법원의 행정력을 낭비하고 싶냐”는 핀잔을 듣고는 분통을 터뜨렸다. C씨 측이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청하겠다고 하자 판사는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냐”고 빈정대기까지 했다.
소액사건(2,000만원 이하)에서 소송 당사자가 왜 졌는지 이유를 판결문에 적지 않아도 되도록 한 법규는 재판의 만족도를 크게 떨어뜨린다. 생계형 법정 다툼을 벌인 국민들은 법정에서 기각 사유를 쉽게 설명해주거나 꼼꼼히 판결문을 쓰는 친절한 판사를 만나지 못하면 억울하게 졌다고 여긴다. 심지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20일간 불법 구금됐던 피해자들은 대법원의 긴급조치 위헌 결정 뒤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단 한 줄의 설명도 없는 1장짜리 판결문을 받았다.
이처럼 고압적이고 불친절한 사법 공무원들의 태도는 사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건들을 신속하게 수사하고 재판하느라 빚어진 면이 없지 않다. 자기 주장만 고수하는 양측의 입장을 하염없이 들어주기도 어렵거니와, 수사나 재판의 결론에 대해 모든 이들이 100% 만족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법 공무원들이 국민에 서비스한다는 마음가짐은 내팽개친 채 자기 편의적 업무처리를 고수하다가 국민의 불신을 산다. 이는 수사결과나 판결에 대한 불복으로 이어져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민에 형사 사법기관으로부터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의식이 커지면 법질서나 법치주의에 대한 불신, 결국 국가에 대한 회의로까지 이어지게 된다”고 심각성을 지적했다.
불신을 증폭시키는 것은 사법기관이 돈과 권력이 있는 이들에게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죄 없는 여대생을 청부 살해하고도 허위진단서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호화 병실 생활을 했던 영남제분 회장 부인 윤길자씨, 허재호(74) 전 대주그룹 회장에 대해 벌금 254억원을 하루 일당 5억원씩 50일간 유치하도록 한 ‘황제 노역’ 판결 등에 시민들이 분노와 냉소를 보인 것이 전형적이다. 이런 일이 보도될 때마다 사람들은 1988년 인질극을 벌인 탈옥수 지강헌의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를 떠올린다.
기댈 곳 없는 국민 전관ㆍ연고 연연
검찰 경찰 판사들이 무지렁이들에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면 국민들은 자연스레 전관 예우를 받을 수 있는 변호사나 법조 브로커를 찾는다. 법원은 전관이 판결에 미치는 영향을 부인하지만, 법정 밖에서부터 전관의 영향력은 무시하기 어렵다. 검사장 출신 변호사 밑에서 일하다 동료들과 법무법인을 연 변호사 D(38)씨는 “검사장 출신 변호사 밑에서 일할 때 한 검사는 조사가 끝나면 따라 나와 ‘검사장께 말씀 좀 잘 전해 달라’며 깍듯했었다. 그러더니 내가 개업해 사건을 맡자 피의자 신문 중 내게 소리를 지르더라”고 말했다.
변호사들은 사건 수임을 위해 ‘전관 판타지’를 확대 재생산한다. 수원지법 부장판사 출신 법무법인 대표인 E 변호사는 “담당 재판부와 지방에서 근무한 선후배 관계로 지금도 모임을 같이 하고 있다”며 의뢰인에게 과시하고 이미 변론이 끝난 사건을 맡은 적도 있다. 고위 법관 출신이 퇴직 후 대형 로펌에 들어가 1,2년 만에 수십억원의 보수를 받았다는 사실이 종종 알려질 때마다 국민들은 전관의 위력을 실감할 뿐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가 고교 동문과 사법연수원 동기 등 재판부와 연고가 있는 변호사가 사건을 맡으면 재판부를 바꾸는 방침을 지난해 8월부터 적용하고 있지만 서울지법의 노력만으로는 법이 ‘있는 자들의 편’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어려운 실정이다. 하창우 대한변호사협회장은 “연고로 얽힌 것만으로도 불공정 시비를 낳는 재판 관행을 어떻게 없앨 것인지 고민해야 해묵은 사법 불신의 고리를 끊는다”고 말했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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