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36.5] 타인의 모멸감과 수치심을 배우기

입력
2018.02.22 19:00
30면
0 0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빈 택시들이 줄지어 오고 순번을 기다리는데 앞 쪽의 남성이 “먼저 타시라”고 내 어깨를 밀었다. 엉겁결에 택시 뒷자석에 밀려 들어가면서 주체성을 박탈당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양보라는 선의에 기분이 나쁘고, 그것이 온당한지 확정할 수가 없어(후배가 양보할 때는 기분 나쁘지 않았는데) 나는 계속 뚱한 표정이었던 것 같다. 그 생각에 골똘할 때 택시기사가 대뜸 “왜 양보 받고도 고맙다고 하지 않느냐? 왜 여자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느냐?”고 크게 화를 냈다.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적대감을 보이는 사람과의 대화를 포기했다고 할까. 택시를 양보한 남성은 그날 밤 자신보다 ‘약한 여성’에게 신사도를 발휘했다는 생각에 뿌듯했을 것이고, 택시기사는 ‘받기만 하려는 염치없는 여자들’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강화했을 것 같다.

무지는 때로 악(惡)과 다름이 없으며, 그들의 탓으로만 돌리면 내 마음도 편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줬더라면. 상대방의 입장이 아닐 때, 사람은 얼마나 무지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집안 공사를 하던 중 일하는 분에게 음료수를 대접하자 “역시 여자가 줘야 맛있죠”라는 말을 들었다는 내 친구는 “그렇게 말씀 하시면 안되죠”라고 대응했다. 바로 정중히 사과를 하더라고. 내 친구는 그 남성의 ‘여혐’을 이야기 하려던 것이 아니고 “지적하니까 알아 먹으시더라”는 깨달음, 그리고 자신의 성취에 대해 말했다. 애니메이션 영화 ‘주토피아’의 주인공 토끼 주디는 자신을 보고 “너무 귀엽다”고 말하는 치타에게, “토끼가 토끼에게 귀엽다고 하는 건 괜찮지만, 다른 동물이 하는 건 좀 그렇다”고 짚어준다. 치타는 바로 사과를 한다.

그러니 나는 택시로 떠밀렸을 때 “기다린 순서로 타자”고 했어야 했고, 그걸 놓쳤더라도 택시기사에게 마냥 넘겨짚는 잘못된 시각을 지적했어야 했다. 내가 제대로 설명했다면, 무지의 힘으로 ‘여혐’의 영토에서 살아가던 그 택시기사를 구조했을지도 모른다.

모멸감, 수치심, 불편함은 세밀한 감정이며 당사자가 아니면 정확히 캐치하기 어려울 때가 있고,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한다. 예전에 택시 비용을 운전기사의 손에 건네지 않고,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둔 적이 있다. 그저 모르는 사람과 손이 닿는 게 썩 유쾌하지 않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택시 기사는 무척 기분 나빠했다. 돈을 건네지 않고 놓아두는 행동이 상대에게 얼마나 모멸감을 주는지, 나는 그 때 알았다.

장애인들은 특별한 차별이 아니라도, 버스에서 자리를 잡을 때 자신에게 집중되는 눈길들을 견딜 수 없다고 한다. 약자에게 아무렇지 않게, 평범하게, 주체적 대상으로 대하는 건 얼마나 중요한가. 여성 연예인에게 ‘애교 한번 부탁한다’고 요청하는 남성 사회자는 상대를 모멸하고 있다는 알아야 한다. 애교는 약자에게만 강요된다.

10대를 보면 으레 부르는 호칭인 ‘학생’이라는 단어,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학생!”하고 부르는 것에 큰 위축감을 느낀다는 설문결과를 본 적이 있다. 우리 사회는 이를 대체할 언어를 만들지 않았다. 사실 어떤 특성을 강조하는 언어는, 그렇지 않은 대상을 배제한다. 아름다운 문장조차 그렇다. 헌신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보도하며 ‘어머니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죠’라는 TV앵커의 감탄은, 부모에게 버림 받은 채 홀로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고아 소년의 마음을 후벼 팔 것이다. 또 ‘독박육아’에 힘들어하는 여성에게는, ‘모성신화’라는 억압으로 다가갈 것이다.

내가 상처받고 싶지 않듯이 타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면, 끊임없이 생각하고 배우고 교정해 가는 길 밖에 없다. 다만 ‘아 뭐가 그렇게 피곤해’라고 배울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특히 이윤택 고은 조민기씨 같은 범죄자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어느 피해자의 말처럼 “사과는 필요 없고, 처벌받기를.”

이진희 기획취재부 차장 rive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