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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못해 서러운데 후배 눈치까지 보며 미래 준비"

입력
2015.05.2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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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엽충, 암모나이트, 시조새, 매머드, 공룡…

학력고사나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던 고교 수험생 시절 달달 외웠던 화석이 요즘 대학생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고 한다. 신입생이나 저학년 후배들이 고학번 선배들을 ‘화석 선배’라고 부르는 것. 화석 선배는 취업 전까지 학생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졸업을 미루는 ‘NG(No Graduation)족’이 늘어나자 학교를 오래 다니고 있는 선배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취업하기 어려워지면서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말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얼마 전에는 취업포털사이트 ‘사람인’이 올해의 취업시장 신조어로 선정할 정도로 널리 확산된 것을 보면 그만큼 취업난이 악화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취업경쟁에서 밀린 것도 모자라 학내에서도 이런저런 눈치를 보며 미래를 준비하는 화석선배 3명에게서 이들의 애환을 들어봤다.

“가능한 조용히 학교 다녀야죠.”

화석선배들은 사람을 만나는 게 가장 큰 스트레스다. 학내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학번이나 나이를 밝혀야 하고, 알고 지내는 후배를 만나면 인사치레라도 근황을 서로 묻다가 결국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취업이나 졸업 등 현실적인 주제로 대화가 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8년 입학해 8년째(군 휴학 2년 포함) 학교를 다니고 있는 A대학 4학년 최모(27·남)씨는 이런 사소하면서도 민감한 문제를 피하려 가능한 조용히 학교를 다닌다. 그는 이미 8학기를 다 채워 2월에 졸업할 수 있었지만, 취업을 못해 졸업을 미루고 3학점 짜리 교양수업 하나만 수강 중이다. 같은 해 입학한 동기들이 대부분 졸업해 말 동무를 할 사람도 몇 안 된다. 그는 “당연히 수업도 혼자 듣고, 밥도 혼자 먹는다”며 “지나가다 아는 사람을 만나도 선뜻 먼저 인사하기가 꺼려진다”고 말했다.

학교 다니는 재미를 잃은 건 오래 전 얘기다. 강의 도중 쉬는 시간에 타과 복학생이 친구에게 “무슨 24살이 미팅을 하냐?”라고 면박을 주는 걸 듣고는 ‘그럼 나는 선만 봐야 하나?’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고 한다. 그는 “나이 많다는 이유로 욕망을 거세당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외로움은 가장 큰 적이다. 개강 초 적적했던 최씨는 모처럼 후배들을 볼 겸 동아리 모임에 참석했다. 새로 가입한 15학번 신입생 후배들로 왁자지껄했다. 동아리에 한동안 뜸했던 그도 반가웠다. 그러나 후배들은 처음 보는, 범상치 않은 선배를 보고는 쭈뼛할 수 밖에 없었다. 최씨가 먼저 용기를 내 “나 너희들이랑 몇 살 차이 안 나”라고 웃으며 서먹한 분위기를 깨려고 했다. 그런데 장난스레 던진 이 한마디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그의 ‘정체’를 파악한 후배가 군대의 ‘다나까’ 말투에다 상대를 가장 높이는 ‘합쇼체’를 섞어 허리를 90도로 숙여 “선배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신입생들도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똑같이 인사했다. 그는 “학번으로는 7년, 나이로는 8살 차이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조직폭력도 아니고 내가 더 불편했다”고 말했다. 특히, 남자든 여자든 테이블에 나와 단 둘이 있으면 안절부절하며 무서워하는 걸 보고는 웃기면서도 씁쓸했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 학기가 되길 바라지만, 취업을 못하면 또 한 학기를 더 다닐 생각도 있다”며 “처지가 처지이다 보니 갈수록 사람 만나는 게 부담스러워진다”고 말했다.

“자넨 왜 아직도 학교에 남아 있나”

B여대 4학년 장모(24)씨는 올해로 7년째 학교를 다니고 있다. 전공과는 다른 금융 쪽에 취업하기를 희망해 경력을 쌓으려 1년6개월 가량 보험회사에 일한 영향이 크다. 그는 “재무설계 실무를 배우면서 학업도 병행하기 위해 3개 학기를 1, 2과목만 수강하느라 한 차례 휴학한 걸 제외하고 어느 새 12학기째”라며 “자연스럽게 졸업이 늦어졌지만,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화석선배의 불편함은 피할 수 없다. 출석에 보다 신경 쓰는 게 대표적이다. 상대평가 확대로 경쟁이 심해져 출석의 비중이 높아진 탓도 있지만, 교수님이 학번 순으로 출석을 불러서다. 그는 이번 학기 듣는 3학점 짜리 강의 세 개 모두 가장 먼저 호명된다. 1, 2학년 때는 5분 정도 늦어도 거의 맨 나중에 불려 걱정 없었지만, 지금은 1분이라도 늦을까 봐 헐레벌떡 뛰는 일이 잦아졌다.

수업 도중 받는 ‘관심’은 더 불편하다. 그는 이번 학기 초 진로 관련 교양수업을 수강하면서 뜻하지 않은 관심을 받았다. 이 강의는 중간ㆍ기말고사가 따로 없고, 조별로 관심 분야(또는 직업)을 조사해 발표하는 방식으로 수업과 평가가 이뤄져, 3주차 때 조원을 구성하는 자리에서 09학번이라고 소개하니까 다른 조원 4명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나’하는 감탄사를 내뱉거나 놀라는 눈빛을 서로 주고 받았다. 나머지 조원들은 올해 입학한 신입생, 12학번, 13학번이 각 1명씩이었고, 또 다른 4학년도 11학번이라 꽤 차이가 났다. 남다른 ‘연륜’ 덕분에 자의 반 타의 반 조장을 맡게 된 그는 이번엔 지나가는 교수님의 한 마디에 전체 수강생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교수님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네는 09학번인데 왜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 있나? 졸업은 언제 하려고?”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 당황한 장씨도 멋쩍게 웃으며 “저도 모르죠”라고 하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그는 “재수해 2010년 지방대에 입학한 친구가 ‘교환학생으로 1년 휴학했는데도, 여기서는 할머니 소리 듣는다’고 해 위로 아닌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장씨 역시 취업되면 8월에 졸업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번 추가로 한 학기를 더 다닐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한국 나이로 26, 27세 까지는 취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여유를 부렸다.

“화석끼리 있으면 무감각해져… 현실 직시해야”

입학 7년 만인 올해 2월 C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김모(26·여)씨는 후배들과 대화할 때 종종 ‘옛날’ 얘기를 꺼냈다. 교환학생, 봉사활동, 취업 준비 등으로 세 차례 휴학(2년6개월)한 뒤 복학할 때마다 학교가 바뀐 얘기를 들려 준 것. 새 본관을 지으면서 절반만 남겨 기념관으로 보존된 구 본관, 기숙사를 지으면서 사라진 학생회관, 지금은 잔디밭으로 바뀐 노천극장 등을 이야기 해주면 후배들은 ‘그건 언제 쩍 얘기냐’며 물었다. 또 주로 전공수업이 열리는 사회과학관을 후배들이 ‘사과관’이라고 줄여 부르는 걸 모르고, 예전처럼 숫자를 붙여 ‘3건물’이라고 했다가 후배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덕분에 그는 ‘화석’이미지가 굳어졌다.

그는 취업난 때문에 학교에 오래 다니는 사람이 늘기도 했지만, 법학과는 사법고시나 공무원을 몇 년씩 준비하는 휴학생과 복학생이 많아 화석선배들이 더 많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사법고시를 준비한 04학번이 올해 2월 같이 졸업하기도 했고, 08학번 동기는 아직도 학교를 다닌다”며 “주위에 학교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 많으니까 위기의식이 좀 덜한 거 같다”고 했다.

그도 취업이 안 돼 지난해 한 학기를 더 다녔다가 절박함이 부족해지는 것 같아 올해 2월 졸업했다. 현재 인턴으로 일하면서 취업을 준비 중인 그는 “재학생이면 취업이나 인턴 기회가 조금 더 많더라도, 졸업하고 더 혹독한 현실을 맞으니까 더욱 분발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김정화 인턴기자(이화여대 중어중문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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