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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운명에 저항하는 20세기 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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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운명에 저항하는 20세기 욥기

입력
2017.11.17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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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로 잘 알려진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의 신작은 세 명의 욥에 관한 얘기다. 무고한 인간의 고통, 그 속에서 신의 불완전함을 보게 된 인간의 삶을 그린다. 에마 러브 제공
‘파이 이야기’로 잘 알려진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의 신작은 세 명의 욥에 관한 얘기다. 무고한 인간의 고통, 그 속에서 신의 불완전함을 보게 된 인간의 삶을 그린다. 에마 러브 제공

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ㆍ공경희 옮김

작가정신 발행ㆍ416쪽ㆍ1만4,000원

인간의 믿음을 시험해보자는 사탄의 제안에 신은 신실한 인간 욥에게 두 단계 재앙을 내린다. 열 명의 자식이 죽는 것, 욥 자신의 육체도 썩어 들어가는 것. 소식을 듣고 찾아온 세 친구는 조언을 건넨다. 신은 완전하기 때문에 죄 없는 자를 벌하지 않는다고, 그러므로 신에게 복종해 죄를 사하라고. 욥은 자신의 사례로 첫 번째 명제는 무너졌다고 반박한다(욥기 19장 5~6절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그럼에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욥은 친구들의 두 번째 조언에 대해,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가보겠다고 다짐한다(23장 10절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죄 없는 인간의 고통에 관한 한 가히 역대급 질문을 던지는 기독교 구약성서 속 욥의 이야기는, 무고한 인간의 고통을 무참하게 목격하는 오늘날 철학과 문학 작품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데 공통된 요지는 이렇다. 욥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기복(祈福)의 상징이 아니라, 다만 신의 불완전함(무고한 고통의 가능성)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라고.

‘파이 이야기’로 잘 알려진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의 신작은 세 명의 욥에 관한 얘기다. 슬라보예 지젝, 필립 로스 같은 1급 작가들이 최초의 인간과 신의 무능을 지적하고 있다면, 마텔은 한번 더 꼰 질문을 던진다. 그 최초의 인간은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여기 ‘가장 나종 지닌 것’들을 몽땅 잃어버린 이들이 있다. 1904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부인과 아들, 아버지를 일주일 만에 잃은 고미술 박물관 학예 보조사 토마스, 1939년 아내를 잃은 ‘높은 산’ 근처 병원의 병리학자 에우제비우, 1980년대 역시 아내와 사별하고 아들의 가정이 파탄 난 캐나다 상원의원 피터 토비다.

가족의 죽음 뒤 세상을 등지기 위해 뒤로 걷던 토마스는 17세기 아프리카 노예들에게 세례를 주는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고통으로 인해 완전해진 인간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만든 십자고상을 찾아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떠난다. 인간의 선의를 의심하다 끝내 신의 완전함까지 불신하게 된 신부의 일기를 찬찬히 읽는 순례의 길에 토마스는 욥처럼 온몸이 벌레로 뜯기는 수난을 겪는다. 순례의 마지막, 역시 자신처럼 무고했던 어린 아이를 차에 치여 숨지게 한 토마스는 구토를 하다 우연히 한 교회에 들리게 되고, 그곳에서 율리시스 신부의 십자고상을 발견한다. “신을 위해” 만든, “인간이 자초한 파괴를 증언할” 십자고상은 사람이 아닌 침팬지의 형상이다.

35년 후, ‘높은 산’ 인근 브라간사에 사는 에우제비우는 새해를 앞두고 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새해를 맞이하던 밤 죽은 아내와 똑같은 이름의 여인 마리아가 남편의 시신을 가방에 들고 그를 찾아오고 “그이를 열어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달라고 요구한다. 시신에는 토사물(토마스가 아이를 친 후 흘린)을 비롯해, 침팬지와 새끼 곰이 들어있다. 마리아는 토마스가 친 아이의 엄마였던 것. 마리아는 남편의 시신 안에 자신을 넣고 꿰매달라고 청한다. “여기가 집이야.”

1980년대 만신창이가 된 피터 토비는 미국 영장류 연구소를 방문했다가 오로지 현재 순간에만 집중하는 침팬지 오도를 만나고, 거금을 주고 사들인다. 미련과 회한 없는, 현재에 충실한 삶이라니. 캐나다에서 생활을 모두 정리한 그는 오도를 데리고 고향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하고, 한 예배당에서 율리시스 신부의 십자고상을 발견한다.

묵직한 주제와 기발한 설정, 수시로 밑줄 긋게 하는 문장의 향연으로 초반부터 설렘을 주는 소설이다. 하지만 100~150쪽 분량의 중편소설 3편을 엮은 옴니버스라 작가 명성만큼의 깊이 있는 사유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쉬운 만듦새(따옴표가 수시로 삭제돼 누구 말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는 감동을 반감시킨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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