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성 기자

등록 : 2018.06.08 04:00

툭하면 뒤엎던 북한, 정곡 못 찌른 미국… 신뢰만 무너뜨려

<1> 북핵 협상 실패에서 배우자

등록 : 2018.06.08 04:00

北, 비핵화 과정 ‘살라미 전술’

대가 챙긴 후 검증은 철저 회피

美 정권 바뀔 때마다 대북 냉ㆍ온탕

각국 이해관계 달라 봉쇄망 구멍

“트럼프ㆍ김정은 합의 필요성 일치

북핵 협상 한계 넘을 최고의 기회”

그래픽=송정근 기자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에서 발원한 25년 간의 북핵 협상은 국제사회의 패배로 귀결됐다. 다가오는 6ㆍ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새로운 시작이다. 이번에는 얕봤던 북핵의 자국 위협이 기어이 현실로 다가오자 결국 미국 대통령이 등판했다.

시간은 북한 편이었다. 속임수로 ‘도발→협상→합의→파기→재도발’ 패턴의 악순환을 반복 생산하며 매번 북한은 전진했다. 공격수는 북한, 수비수는 미국이었다. 승부를 가른 건 의지였다. 핵 보유에 사활을 건 북한을 상대로 미국은 사력을 다하지 않았다. 악당이란 이유로 대책 없이 먼저 합의 이행을 중단하는가 하면 협상 교착을 방치하고 무모하게 상대 자포자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전략마저 허술했다. 돈이란 당근은 체제 안보가 간절한 상대 욕망을 자극하지 못했고 온 힘이 실리지 않은 채찍은 견딜 만했다.

북한의 기만

협상 실패의 최대 원인이 북한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의 급서(急逝) 이후 후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는 생존 전략이 절실했다. 선군(先軍)정치가 대내용이라면 대외용은 핵 개발이었다. 2001년 정권을 잡은 미 공화당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이듬해 1월 연두교서를 통해 이란ㆍ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선제 공격으로 정권을 교체해야 할 대상”이라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자 북한의 안보 불안감은 더 커졌다. 덩달아 핵 무장 동기도 부풀었다.

놓을 수 없는 ‘생명줄’인 핵이 미완이다 보니 북한은 어떻게든 시간을 벌기 위해 온갖 술책을 동원했다. 대표적인 게 ‘벼랑 끝 전술’이다. NPT 탈퇴, 핵 동결 합의 파기,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 추방, 연료봉 재처리,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 극약 처방으로 파국의 공포를 안겨주고 상대방이 협상 테이블을 차리게 했다.

핵 폐기 직전 단계인 핵 프로그램 신고ㆍ검증 앞에 핵 시설 동결과 불능화를 끼워 넣은 건 비핵화 과정을 여러 단계로 잘게 쪼개 최종 단계에 이르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보상도 많이 받아내려는 ‘살라미 전술’에 해당한다. 검증은 철저히 회피했다. 합의가 힘든 핵 폐기 과정은 뒤로 미루거나 미합의 상태로 방치한 채 일단 동결로 경제적 대가부터 챙긴 다음 검증 받을 시점이 되면 어김 없이 합의를 무너뜨렸다. 이른바 ‘백 로딩’(back-loadingㆍ후기 이행)이다.

검증은 덫이었다. 북한은 경수로 건설 지연을 빌미로 2002년부터 사찰을 거부해 1994년 미국과 맺은 제네바 합의를 깼고, 6자회담 성과였던 2005년 9ㆍ19 공동성명도 북한의 검증 거부 탓에 사실상 파기됐다. 북한이 신고한 검증 대상이 전부인지를 놓고 양측이 실랑이를 벌이다 사찰에 이르지도 못하고 합의가 좌초한 것이다.

미국의 방관

북한의 일관된 사기 행각에 미국은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대를 믿을 수 없는 건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한미의 대북 정책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선거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미는 냉ㆍ온탕을 오갔다. 보수 정권은 을렀고 진보 정권은 달랬다. 의회 내에선 대북 유화파와 강경파 간 알력이 끊이지 않았고 집권당은 전 정권이 서명한 합의문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늘 북핵 협상은 헛돌았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대북 정책인 '전략적 인내'는 전략 없이 인내하다 북한이 핵 개발할 시간만 벌어준 실패한 정책이라는 비판을 자주 듣는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네트워크 '레 나폴레잉'의 초청 모임에 참석해 연설하고 오바마 전 대통령. 파리=AP 연합뉴스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과 포용이 모두 소용 없었던 건 정도가 충분하지 않았던 데다 정곡을 찌르지도 못해서였다. 우선 봉쇄망이 성겼고 유인책도 미지근했다. 노무현 정부 초대 외교통상부 장관인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는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선 ‘최대 압박과 최대 관여’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국제사회가 협력해야 했는데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제각각 달랐다”며 “미온적 제재ㆍ보상으론 북한을 바꿀 수 없었다”고 분석했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경제적 접근법은 북핵 같은 고도의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에 한계가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적극 해결하기보다 봉합에만 급급했던 미국의 태도가 어쩌면 가장 심각한 문제였는지 모른다. 조성복 독일정치경제연구소장은 “중국을 저지하고 동북아시아에서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핑계를 만들려면 북한이 적대국으로 남아 있는 편이 미국에겐 좋았다”며 “이중적이고 모호한 대북 정책을 미국이 구사했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절호의 기회

하지만 이제 기회가 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케미스트리’(조화)는 한반도에 축복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실무진끼리의 합의라는 지금껏 북핵 협상의 한계도 이들은 초월할 수 있다. 외교 업적과 경제 도약으로 각각 목표는 다르지만 합의 성사가 필요하다는 점에선 두 정상의 이해가 일치한다. 걸림돌이 없진 않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대중 봉쇄망을 완비하기도 전에 중국 견제 레버리지(지렛대)인 북한과의 관계를 풀어버리려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 전략가들은 못마땅할 것”이라며 “이젠 그들이 되레 북한 비핵화 의지를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면서 검증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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