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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빌려온 지식, 체화된 지식

입력
2017.08.30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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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가 유행인 모양이다. 성경 필사, 고전 필사. 시집 필사, 소설집 필사까지. 전자책이 흔한 세상에 항거하듯 연필이나 만년필로 책 베끼기라니!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저 엄혹한 독재시절 나는 독재정부가 불온시 하던 시집이나 철학서를 몰래 빌려다 필사했다. 며칠 밤을 새우며 그렇게 필사한 노트를 책장 뒤에 숨겨놓고 틈틈이 꺼내 읽었지. 아마도 요즘의 필사 유행은 그런 절실, 절박함은 없으리라. 그 시절 그렇게 공들여 베껴 읽은 책들은 그야말로 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이었지.

아열대 기후로 급변한 올 여름은 하루하루 무척 견디기 힘들었다. 이열치열이라고 텃밭에 나가 일부러 땀 흘리고, 서늘해지는 밤엔 일부러 무거운 책을 읽었다. 올 여름엔 700쪽이 넘는 책과 씨름했다.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왜 그렇게 무거운 책을 읽느냐고?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 바다 위를 떠다니면서 너무 쉽게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관성에 젖어 삶의 깊이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던가.

앞서 어렵게 필사한 얘기를 했지만, 그렇게 힘들여 얻은 지식은 오늘날 인터넷 바다에 떠다니는 것을 손가락만 까딱거려 퍼온 지식과는 다르다. 힘들여 얻은 지식과 인터넷 바다에서 퍼온 지식 가운데 어떤 지식이 더 우리의 삶을 유용하게 할 양식이 될까. 나 역시 인터넷에서 얻은 지식을 활용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사실 그렇게 쉽게 얻은 지식은 쉽게 잊혀지고 말더라. 또 그렇게 얻은 지식으로는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더라. 내 수고와 노력과 체험에서 비롯되지 않은 지식, 그건 ‘빌려온 지식’이 아닌가. 그렇게 빌려온 지식, 즉 자기 몸으로 체화된 지식이 아니면 우리 존재에 진정한 변화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여행을 다녀 봐도 그렇다. 해외여행 패키지를 끊어 며칠 동안 분주히 이곳 저곳을 다녀오면, 몇 장의 사진 외엔 별로 남는 게 없다. 만일 우리가 여행을 통해 자기 삶의 변화를 꾀한다면, 어느 정도 넉넉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내 경험으로는 여행 기간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될 때, 자기 삶의 변화를 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읽기도 마찬가지. 한 저자의 책을 며칠 만에 후딱 읽어치우는 것과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오래 전에 읽은 카렌 암스트롱의 책을 이번에 다시 한 달에 걸쳐 읽었는데,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내 가슴이 저자의 사상에 흠뻑 물들고 교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방금 ‘물든다’는 표현을 썼는데, 천연염색을 해본 내 경험으로는, 천에 물을 들이는 데도 적지 않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 예컨대 감물 염색을 한다고 했을 때, 오랜 시간 천을 감물에 담가 쉬지 않고 정성껏 주무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빨랫줄에 널어 햇빛에 말리고 또 물을 뿌려 다시 말리는 오랜 수고를 거칠 때 비로소 내가 원하는 색깔의 천을 얻을 수 있다.

여하튼 우리가 좋은 책을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읽으면, 그 책은 분명히 우리 삶에 질적 변화를 가져다 준다. 지난 여름 내가 읽은 카렌 암스트롱의 책은 이 천박한 우리 시대정신에 경종을 울릴 뿐만 아니라 앞뒤로 꽉꽉 막혀 있는 우리 삶의 출구를 마련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소위 모던한 것을 추구하는 이들은 옛 것이라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카렌 암스트롱이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축의 시대정신은 결코 곰팡스럽지 않다. 카렌 암스트롱이 확신에 차서 하는 말을 들어보자.

“뛰어난 과학기술적 재능에 뒤처지지 않는 어떤 정신적 혁명이 없으면, 이 행성을 구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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