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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삶의 마지노선 '노동자의 시간' 기본소득으로 보장해야

입력
2015.06.0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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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정부식 제조업, 창조경제 전략, 노동 유연성 극대화에 초점

노동자 시간단위로 전락

고용 취약층 시간 매매에 내몰려, '착한' 공유경제 모델도 마찬가지

노동이 소외되지 않는 산업생태계, 새로운 앱 개발하는 것보다 중요

스위스에서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헌법 개정 운동을 벌이는 이들이 13만명의 서명을 받은 국민발안 제출 후 금화를 쏟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스위스는 이와 관련된 국민투표를 2016년에 진행할 예정이다. ⓒEnno Schmidt
스위스에서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헌법 개정 운동을 벌이는 이들이 13만명의 서명을 받은 국민발안 제출 후 금화를 쏟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스위스는 이와 관련된 국민투표를 2016년에 진행할 예정이다. ⓒEnno Schmidt

한국 정보통신기술(ICT) 담론에서 ‘노동’의 문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소외되어 있다. 디지털 시대의 책사(策士)를 자처하며 정부나 기업의 의사 결정에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서 디지털 신자유주의의 폭압에 맞설 방법을 고민하는 목소리는 초라하다.

노동유연성 높여도 창조력 없다

노동은 산업 현장뿐 아니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모든 시공간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급여가 지급되는 근무 시간은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한 인간의 마음과 몸, 생각에 갖춰지는 몇 천 배의 시간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삶이 곧 노동이다. 노동자가 일터에서 직간접적으로 쏟아붓는 평생의 시간에 제값을 내는 기업은 없다. 따지고 보면 모든 급여는 최저 시급인 것이다. 고용-피고용의 관계를 넘어 사회 전체가 노동하는 삶의 존엄과 자율을 책임져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자 스스로 당당히 더 나은 사회를 요구해야 한다. 힘껏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런 요구를 할 자격이 있다.

노동 문제를 제쳐 두고 건강한 산업 생태계에 이를 길은 없다. ICT 산업이라고 피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고 경쟁에서 앞서갈 블루 오션만 좇는 횡포는 궁극적으로 산업뿐만 아니라 삶의 황폐화를 조장한다. 이 수순을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제조업 창조경제 전략인 ‘인더스트리 4.0’이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더스트리 4.0은 ICT와 제조업의 완벽한 융합을 통해 구축되는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뜻한다. 독일 정부가 2011년에 내놓았던 ‘하이테크 비전 2020’에서 처음 주창됐고,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론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로 이 개념을 이식했다.

인더스트리 4.0은 노동 환경의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전제한다. 디지털 격변기의 생산 환경에 맞춰 노동자를 제때 알맞은 곳에 활용할 수 있도록 노동 유연성을 극대화하자는 전략이다. 많이 듣던 이야기의 재탕이다. 번지르르한 신조어를 덧붙였다는 것만 빼면 지난 20여년 동안 진행된 신자유주의 노동 정책의 끝판왕이다. 외환위기(IMF) 이후 들어섰던 역대 신자유주의 정권과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에서도 정규직의 유연성 확보, 비정규직의 직업 안정성 강화를 목표로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말엔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에 중규직 제도를 두겠다는 구상도 발표됐다. 노동계의 반발은 당연했다. 한국 노동자들의 근속연수 평균은 5.1년밖에 되지 않고, 실업급여를 비롯한 사회안전망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머지않아 정규직이 역사 속의 개념으로 사라질 수 있다.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새로운 산업 생태계에서 구조 조정될 사양산업 종사자들이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사실상 이들은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런 형편에 노동자에게서 쥐어짤 창조력과 상상력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공유경제권은 기존 산업 생태계와 마찰을 빚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광장에서도 택시종사자 3,000여 명이 우버와 렌터카의 불법 택시 영업을 처벌하는 법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사진은 런던의 우버 항의 시위 현장. ⓒflicker
공유경제권은 기존 산업 생태계와 마찰을 빚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광장에서도 택시종사자 3,000여 명이 우버와 렌터카의 불법 택시 영업을 처벌하는 법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사진은 런던의 우버 항의 시위 현장. ⓒflicker

삶의 모든 것을 파는 디지털 시대

한편 인더스트리 4.0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스마트한 노동자의 생존 매뉴얼로 ‘공유경제론’이 날로 각광받고 있다. 불안정한 고용 환경에서 줄어든 수익을 벌충할 새로운 경제권이 공유경제에 있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기업이 노동자의 삶을 착취하고 소모하는 방식을 노동자 스스로 자기 삶의 경영에 도입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미디어 이론가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는 디지털 네크워크에서 인간 시간의 조각이 매매되고 재조립되면서, 노동자는 단편적인 세포 시간의 단위로 전락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이를테면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고용되는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 새벽 2시부터 5시까지 컴퓨터 화면 앞을 떠날 수 없는 귀와 손가락, 혹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의 각종 감정 노동에 보수가 지불된다. 노동자는 언제든 교체 가능한 생산 요소, 네트워크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 들어가는 재조합적 기호 작용의 미세한 일부에 지나지 않게 된다. 기업 입장에선 마다하기 힘든 유혹이다. 원가 절감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사회적 보호라는 의무까지 강제받지 않게 되었으니 당장은 반길 만한 변화일 수 있다.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와 선한 의지로 가득해 보이는 공유경제론에서도 노동의 부스러기화는 여지없이 진행되고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라도 따라하기 쉽다. 겉으로 보기엔 음흉해 보이는 구석도 없다. 주문형 개인 기사 서비스인 우버(Uber)나 홈스테이 연결 네트워크인 에어비엔비(AirBnB)를 활용하면, 원하는 시간에 택시 기사나 호텔리어가 될 수 있다. 여느 때처럼 다니던 길을 다니다가도 요금을 내는 손님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재 시간 동안 놀리는 방을 누군가에게 임대할 수도 있다. 우버와 에어비엔비의 사업 모델을 응용하면 삶 전체를 ATM 기기처럼 운영할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원하는 시간 동안 내 부엌을 식당처럼 운영한다거나, 비경제활동이었던 습관적인 동네 산책을 누군가에게 데이트 서비스로 제공하고 돈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이렇게 돈을 벌어야 할까? 가계 부채가 가중되고 고용 안정성이 악화할수록, 가난한 사람들은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일에 더욱 목매달 수밖에 없다.

안정된 고용 환경과 합리적인 소득 분배는 인간의 시간을 계산 불가능하고 계량화할 수 없는 차원으로 보존하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다. 시간은 인간적 존엄의 지표여야 하고 교환가치로 가늠할 수 없는 사회적 연대, 믿음, 사랑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도 시간은 자본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시간과 자본은 디지털 네트워크에 합일돼 분간할 수 없게 되었고, 상업화시켜선 안 될 삶의 영역을 내버려두지 않고 있다.

가장 강력한 대안은 기본소득 보장

이 모든 변화를 통해 더 나은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제레미 리프킨은 최근작 ‘한계비용 제로 사회’(2014)에서 스마트 인프라에 기초한 협력적 공유경제의 미래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유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책은 디지털 신자유주의가 이미 공유경제를 전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도록 무신경하다. 리프킨은 미래의 주역 세대에게 다가올 변화에 대비하고 희망을 품어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바로 그 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최악의 노동 문제에 대해서는 불가피한 과도기쯤으로 치부하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복잡하게 뒤얽힌 문제를 섣불리 역사의 후경으로 떠밀어버리는 것이 미래학자들이 즐겨 쓰는 ‘종말’이라는 소실점이다. 이런 식의 미래학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낡고 투박할지언정 ‘노동의 현재’를 논의하는 데 귀 기울여야 한다. 1억6,300만개의 일자리가 몇 백만 개로 줄어드는 참담한 과정이야말로 미래의 종말이다.

리프킨에 따르면 이 과정을 거친 뒤 금세기 중반쯤 전 세계 고용 인력 대다수가 협력적 공유사회의 비영리 부문에서 일하게 될 거라고 한다. 그가 말한 대로 미래 사회가 무료에 가까운 재화 및 서비스를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협력적 공유경제의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직업을 잃고 생존의 위기에 몰린 사람들에게는 미래는커녕 내일도 불확실하다. 그들은 오늘 당장 무엇을 팔아야 하는가를 고민한다. 최악의 자본주의는 궁지에 내몰린 이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들이 상품으로 바꾸어선 안 될 것을 상품화하고, 상업화시키지 않아도 될 시간을 시장에 내놓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싸움을 위한 프로메테우스의 불꽃은 다름 아닌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인간다운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초 생활비를 보장하는 일이다. 낯설고 급진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18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머스 페인의 ‘토지분배의 정의’에서 기본소득의 핵심 논리가 제기된 이후 오늘날까지 꾸준히 주장됐다.

노동이 소외당하지 않는 디지털 문화를 위해서라도 기본소득은 새로운 인터넷이나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돈이 될 사업이라는 구속으로부터 우리 시대의 디지털 문화를 자유롭게 할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하다. 노동자가 자기 삶의 존엄과 자율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소득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은 산업생태계 전체의 건강한 순환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런 구상은 어째서 인더스트리 4.0이 될 수 없단 말인가? ICT의 미래와 어떻게 무관할 수 있단 말인가? 기본소득은 다른 이들의 노동으로 빌어먹는 염치없는 구호 대상자들의 춘몽이 아니라, 이 사회가 한 번도 제값을 낸 적 없는 노동의 참가치와 사유화된 공유지의 대가를 청산 받기 위한 장치다. 역사 속에서 사회 전체에 축적된 지식이 가치 창출의 중심이 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자본주의는 자기 바깥에서 형성된 역량을 부당하게 약탈했다. 토지와 공기, 물, 숲, 바다와 같은 공유지뿐 아니라 노동하는 영혼에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다. 함부로 빼앗겨선 안 된다. 이미 빼앗긴 것들에 대해서도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고 되찾아 와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우리는 부스러기 노동의 조각에 불과하다.

임태훈 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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