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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비워야 더 크게 채운다

입력
2017.11.23 14:0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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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 가지가 내려앉았다. 지난 여름 50년이 다 된 아름다운 수형의 반송이 폭우 뒤의 물먹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허벅지만한 맨 아래 큰 가지가 찢겼다. 내 팔이 우지끈 꺾이듯 가슴이 철렁했다. 폭설로 쌓인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해 소나무 줄기가 내려앉는 것은 가끔 보았지만, 물의 하중으로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처음 겪었다. 가지에서 가지를 쳐 나간 촘촘한 솔잎들이 물을 머금으면서 지구의 중력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근간(根幹)이 받치는 힘의 범위를 벗어난 허장성세(虛張聲勢)의 결과일 수 있다.

20년 전 이 아름다운 반송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양조장집과 실랑이를 하며 그때 형편으로는 거액을 들여 어렵게 구했던 반송이었다. 처음 갖는 자랑스런 나의 우주목(宇宙木)이었다. 반송과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분에 넘치는 비싼 나무를 키운다는 아내의 시샘을 외면하며 더한 애정을 쏟았다. 처음 몸살을 앓을 때는 나도 맞아본 적이 없는 영양주사를 서너 해 동안 주기도 했다. 존재 자체로 상징이 되었다. 광릉숲 옆에 마련한 집 뜰 전체를 아우르는 수호목이었다.

반송은 여러 가지의 끝부분에 촘촘하게 난 솔잎들의 집합이 초가집 지붕처럼 푹신한 느낌을 준다. 해가 더해질수록 앙증맞은 초록우산의 이 반송이 장자(莊子)의 대붕(大鵬)의 날개 같은 하늘우산을 펼치며 내 곁을 지켜줄 모습을 그리는 유쾌한 상상을 하는 나날이었다. 죽은 가지를 털어내고 웃자라는 싹을 매년 잘 다듬어 주며 푸르른 성채(城砦) 같은 웅장한 모습만 즐기면 되는 줄 알았다. 귀티 나는 겉모습에 빠져 작은 가지 하나 함부로 자르지 못한 과잉보호였는지 모른다.

자랄수록 안으로 깊어가는 무게 중심 때문에 본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 팔을 스스로 부러뜨리지 않을 수 없는 나무의 성장통(痛)을 알아채지 못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한계를 넘어설 때는 근본이 부러질 수도 있는 자연의 섭리가 그것이다. 이상기후로 삼사 년 태풍도 없었는데 시간이 쌓이면 나무에게 이런 일도 일어난다. 불현듯 수목원에서 한창 잘 자라는 반송 3천 그루도 이럴 수 있다는 깨달음에 가슴이 먹먹하다. 10년, 20년의 가까운 미래의 시간을 뛰어넘는 또렷한 그림이 스친다.

찢긴 가지를 몸통 가까이에서 베어낼 수밖에 없었다. 생명의 울음도 있었을 것이다. 좌우 균형을 맞추려고 잘 자라는 다른 굵은 가지들도 베어야 했다. 소나무는 가지 하나하나가 또 다른 하나의 소나무 수형(樹形)을 갖는다. 사랑스러운 소나무 몇 그루를 베어낸 셈이다. 20여 년 눈에 익었던 수형은 간 곳이 없다. 입영 전야에 머리를 깎은 거울에 비친 청년 모습처럼 어설프기도 하다. 이삼년 부지런히 솔밥이 채워지면 또 다른 수형을 선물할 것이다. 초록우산이 벗겨진 쉰 살 몸통의 근육질이 더욱 강건하게 용틀임하는 모습이 드러난 것은 또 다른 덤이다.

지난 반년은 이런 깨달음으로 수목원의 반송 3천 그루의 손질에 눈코 뜰 새 없었다. 4년 만에 잔뿌리까지 잘 내려 성장에 탄력이 붙었는지 스무 살의 녀석들이 지난해부터는 내 키를 넘어 압도하기 시작했다. 자식 키우는 마음과 또 다른 가슴 뿌듯함뿐이었는데 이제는 20년 후의 비바람과 폭설을 견딜 녀석들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우선 지금의 아름다운 수형은 무시하기로 했다. 땅에 가까운 굵은 아랫가지들을 베어내 바람 길을 열었다. 뿌리박은 가지를 중심으로 살리면서 약한 가지와 곁가지들을 쳐냈다. 삶이 그러하듯 지금은 아름다운 수형을 이루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곁가지의 운명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반송밭이 조금은 낯선 풍경이 되었지만, 신선함으로 변신할 두세 해 후의 봄날을 기다린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많이 아팠을 나무들이 재창조할 그들의 찬란한 봄을.

조상호 나남출판ㆍ나남수목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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