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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악(惡)의 학습장’을 넘어서

입력
2017.11.14 14:2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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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내내 흉흉하고 참담한 뉴스가 넘쳤다. 지난 3월 10대인 김양은 공원에서 놀고 있던 초등학교 2학년생을 유괴, 살해한 뒤 시신을 잔혹하게 훼손하고 유기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김양의 부모가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렸고, 본인은 감형을 노린 듯 유치장에서 정신질환자 연기를 연습하며 킬킬 웃었다고 한다. 초등학교의 수련회장에서는 유명인의 자녀들이 포함된 아이들이 같은 또래를 잔인하게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고, 개중 일부는 물의가 일자 “교육청 하나도 안 무서워한다”고 뻐기기도 했다. 최근 서울, 천안, 아산, 강릉 등지에서 여중생 집단 폭행이 같은 또래에 의해 자행되었고, 일부의 경우 강제 성매매, 성폭행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조직적 성폭력의 경우 피해자를 모욕하고 상대를 미천한 대상으로 낮추려는 의도가 가해자들 사이에서 드러나는데, 많은 경우 그들 역시 가정과 학교에서 미천한 대상으로 취급받은 개인적 경험이 투사되기도 한다.

초등학생을 유괴 살해한 김양, 친구를 밟으며 즐거워한 초등학교 아이들, 또래 여중생에게 잘근잘근 린치를 가하고 망가뜨리며 쾌감을 공유한 여중생들과 같이 구체적 잔혹성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는 이들 사이에서도 모종의 심리적 공통점은 발견된다. 악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철학자 애덤 모턴(Adam Morton)에 따르면, 인간 본연의 폭력억제 기제를 특정한 상황 속에서 정당화 기제를 통해 뛰어넘어, 마치 자신이 강자가 된 양 자부심을 느끼며 자존감을 보상하려 드는 행위는 인간이 악을 실천하는 전형적인 심리적 메커니즘이라고 한다. 자신을 폭력적 인간으로, 공포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내면의 취약한 자존감과 과거 공포감을 느꼈던 상처를 보상받고, ‘강한’ 인간이 된 데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 영리한 일부는 도덕적인 비난이 예상될 때에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사람들을 속이는 교활함을 발휘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특출한 능력인 양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고 한다.

사회의 악한 습속은 극단적인 소수의 범죄에 의해서만 되풀이되고 증폭되지 않는다. 그간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나는 모턴이 설명한 인간 유형이 낯설지 않았다. 비슷한 가학적인 심리 상태와 동기가 체화된 사람들을 학교에서, 군대에서, 사회 생활 속에서 내내 만났다. 칠판에 글씨를 쓰다가 분필이 부러지면 “필시 이 중에 나를 마음속으로 저주한 놈이 있어서일 게다”며 반 학생들에게 전체 기합을 줬던 고등학교 교사나, 자신이 제대하는 기념으로 훈련소에 입소한 사관후보생들을 완전군장으로 1㎞ 이상 기게 하며 즐거워 한 훈육관 장교나, 자기 마음에 안 든다며 연구원 박사 면전에 보란 듯이 보고서를 집어 던진 젊은 관료에게는 공통적인 심리적 동기와 사회문화적 정당화 기제가 작용하고 있다. 공적 권력을 사유화하고, 자의적인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기회 속에서 자신이 강자가 된 양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제도와 사회문화의 씨앗이 우리 역사의 곳곳에 뿌려져 있다. 이보다 덜 드러나는, 저강도의 은밀한 학대 행위와 수법은 평범한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만연해 있고, 종종 악한 인간이 솔직하고 매력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촛불 항쟁 1주년을 맞는 요즘, 과연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이른바 적폐의 근원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민주주의가 피부에 와 닿으려면, 적어도 이런 ‘사회적 변태’들이 제도와 사회문화 속에서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이 멈춰야 하지 않을까. 악한 행위를 강함의 표식인 양 학습하고, 그 관리 수법을 꼼꼼하게 가꾸는 이들이 우리 눈앞에 그 뻔뻔한 얼굴을 다시 들이밀지 않았으면 싶다. 그런 이들 중 일부가 사회에서 성공하고 최정상에 오르는 모습도 보여 줬으니, 행여 욕하면서 닮을까 무섭다.

김도훈 아르스 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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