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젤로 시원한 곳이 피아골? 문수골?… 다리 밑이 최고 명당이여"

입력
2015.08.28 16:44
0 0

동네 뒤 고속도로 교각 아래 모여 물놀이하고 낮잠 자며 망중한 즐겨

피아골 계곡. 여름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지만 현지인들은 뒷산 시원한 다리 밑 개울을 선호한다.
피아골 계곡. 여름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지만 현지인들은 뒷산 시원한 다리 밑 개울을 선호한다.

어떤 음악가가 심장을 울리는 악기로 첼로를 꼽은 적이 있다. 심장이 눈물을 흘린다는 건지 종처럼 공명한다는 얘긴지 모르겠지만 동의한다. 그리고 첼로보다 더한, 쿵쾅쿵쾅 심장을 때리는 소리가 있다. 바로 경운기 시동 소리다. 손으로 엔진을 돌려 시동을 걸 때 특별히 느낌이 묘하다. 왼손으로 엔진 아래 레버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몸체에 꽂아 돌린다. 흡사 끌어안고 귀를 기울이는 자세처럼 보인다. 있는 힘껏 손잡이를 돌리다가 표현하기 힘든 적당한 때에 손잡이를 빼면 무거운 쇳덩어리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터어엉 터엉 텅 텅 터터터터터.” 힘차고 우렁차다. ‘오늘 일 한 번 해볼까나~’ 소리지르듯 농장을 울린다.

“우리 경운기는 잘 있는가?” 지지난달 감자를 캐며 빌려 왔던 경운기를 반납하라는 전 이장님의 부드러운 명령이 있었다. “쓰고 바로 갖다 놓겠습니다” 했던 약속도 두 달이 지났다. 경운기 대가리 밑에 감자수확기가 달려 있어 타고 갈 수는 없고 슬슬 끌고 가야 했다. “급허지 안응게 시나브로 가져오소” 하셨지만 몇 번을 망설이다 하신 말씀일거다. 급한 마음에 트럭 빌려다가 올려 싣고 갈까 생각도 들었지만 빌려오고 갖다 주고 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라 관뒀다. 아침나절 슬슬 걸어갔다 오는 맛도 있어서 그냥 움직이기로 했다.

장갑 다져 끼고 엑셀레이터 조절하고 기어를 후진으로 넣은 뒤 클러치를 풀었다. ‘텅’ 하고 경운기가 움직이는데 갑자기 눈 앞이 하얘졌다. ‘저속’에 있어야 할 보조 기어가 ‘고속’으로 돼 있었다. 쇳덩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고 밑에 달린 감자수확기가 정강이를 때렸다. ‘깡’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실제 소리인지 맘 속 울림인지는 모르겠다. 급하게 멈추고 주저앉아 장화를 벗어 던지고 다리를 문질러댔다. 점점 더 아팠다. 소리지르며 떼굴떼굴 구르고 싶은데 봐 줄 사람이 없으니 신음소리도 안 나온다. 땀만 쏟아졌다. 억울했다. 두터운 살집에 멍도 잘 안 드는 편이라 집에 가서 아프다고 해봐야 잘 믿어주지도 않는다.

벼꽃이 피었다. 벼꽃은 그 흔한 꽃잎이 없어서 농부가 아니면 핀 줄도 모른다. 이제 곧 대가 처지기 시작하고 40~50일이 지나면 쌀알이 영근다.
벼꽃이 피었다. 벼꽃은 그 흔한 꽃잎이 없어서 농부가 아니면 핀 줄도 모른다. 이제 곧 대가 처지기 시작하고 40~50일이 지나면 쌀알이 영근다.

떼 쓰려다 제풀에 일어나는 아이처럼 마음 추스르고 농장을 나서는데 장씨아저씨가 차를 세우셨다. “경운기 갖다 드리는가?” “예, 너무 한참 놔뒀어요.” “내 경운기에 싣고 가. 거기꺼정 언제 걸어 갈라구 그랴.” 호박 재배 비닐하우스를 재정비하는 시기라 요즘 여유가 생기셨나 보다. “산보 삼아 걸어갔다 올라구요. 근데 하지 지난 지가 두 달인데 해는 짧아져도 왜 이렇게 덥대요?.” 아저씨는 혀를 차셨다. “그라믄 12시가 젤루 더워야지 왜 2시 3시가 덥당가. 이 미련 곰탱아. 맘대로 혀!” 아저씨는 앞서 가셨고 나도 정강이 한 번 더 문지른 뒤 조심스레 움직였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는지 읍으로 향하는 차들이 속도를 내며 지나쳤다. 선선하던 기온도 가파르게 올라갔다. 땀도 나고 다리는 욱신거리고, ‘아저씨 말씀 들을 걸 그랬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유난히 더운 날씨에 쓰러지는 사고도 많이 있었다고 하니 간전댁할머니 걱정이 일었다. 여든이 넘으셨는데 아직도 면사무소 청소일 다니시고, 당신 텃밭은 물론이요 우리 집 농사까지 걱정하시느라 힘들게 여름 나시다가 편찮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며칠 전 우리 차에 타신 김에 잔소리를 좀 드렸다. “할머니, 여름엔 일하시다가 목마르지 않아도 물 많이 드셔야 한대요. 무리하면 쓰러지세요.”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셨다. “요즘 이정도 일 갖고는 안 쓰러져요. 아 옛날에는 여름에 남의 집 일 허고 오면 오뽀를 불어요. 그러고 나서 또 이녁 일 더 허고도 살았당게요” 시계가 드물던 시절, 정오와 자정 가까운 시간에 관청에서 싸이렌을 울렸고 어르신들은 그걸 ‘오뽀’라고 불렀다. 할머니가 말씀 하신 오뽀는 자정에 가까운 것으로 밤 12시가 되도록 남의 집 일을 하고도 집에 와서 또 당신 일을 하며 살았다는 뜻이다.

“시방은 나은 거제 그때는 참말로 힘들었어요. 짬 내서 정자(부엌)간에 앉아 밥 한 술 뜨다가는 숟가락을 부샄에 부은 적도 있응게요.”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잠깐 부엌에 앉아 아궁이에 불 때며 끼니를 때우다가 정신이 없을 정도로 힘들어 입으로 들어갈 밥을 아궁이에 넣으신 적이 있다는 말씀이다. 더위 걱정에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할머니 말씀은 힘들다고 칭얼대는 아이 달래 듯 ‘이정도 갖고 힘들다고 하면 산신령이 이노옴! 해요’ 하는 말씀처럼 들렸다. “어쨌든 물은 자주 챙겨 잡수셔야 돼요” 다짐을 받으며 아닌 척 했지만 많이 부끄러웠고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이번 여름엔 더위와 가뭄으로 농작물 피해가 심했다. 뜨거운 볕에 화상을 입은 듯 벌겋게 탄 것은 단감이다.
이번 여름엔 더위와 가뭄으로 농작물 피해가 심했다. 뜨거운 볕에 화상을 입은 듯 벌겋게 탄 것은 단감이다.
물을 흠뻑 빨아들이며 커야 할 토란은 가뭄으로 바짝 말라 죽고 있다.
물을 흠뻑 빨아들이며 커야 할 토란은 가뭄으로 바짝 말라 죽고 있다.

시속 4킬로미터로 움직였지만 경운기 배기가스는 덤프 트럭 만큼 나왔고 속은 울렁거렸다. 전날 야유회에서 마신 술의 찌꺼기가 아직 뱃속에 남아 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땀에서도 술 냄새가 났다. 뜨거운 여름에 하루 쉴 겸해서 시원한 계곡에서 고기나 한점 씩 하자던 형님들과 함께 했는데, 계곡에 물은 없었고 돗자리에 술은 넘쳤다. 휴대폰 광고 문구가 오버랩 됐다. ‘형님들이 쉬자고 하는 건, 쉬는 게 아니라는 것.’

내려와서 얼마 안 돼 마을회관 당산나무 아래 앉아 있다가 동네 동갑내기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피아골이나 문수골같이 관광객 많은데 말고 여기 사람들 자주 가는 좋은 자리 없어?” 여기가 어딘가. 사람들 애써 놀러 오는 구례 아닌가. 섬진강이 흐르고 지리산을 끼고 있어 왠지 아무도 모르는 계곡에 놀기 좋은 자리 하나쯤 숨겨놨을 법 해서 얘기를 꺼냈다. “친구나 친척들 왔을 때 조용하게 쉴 만한데 말하는 겨?” 이 친구도 금방 알아들었다. “고렇쥐! 조용하고 시원하고 고기도 좀 궈 먹을 수 있고.”

친구는 당장 자기 트럭에 나를 태우고 앞장섰다. 20분쯤 달리다가 산으로 올라갔고 계곡이라고 하기엔 개울에 가까운 물이 흘렀다. ‘이런 곳에 비경이 숨어 있다니’ 생각하며 숨을 죽였다. 트럭을 급하게 꺾으며 세운 친구가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 아는 사람들만 아는 자리여. 어쩔 땐 일찍 와야 허네.” 담배를 꺼내 물으며 자랑스럽게 보여준 곳은 산 중턱 임도가 지나가는 다리 밑이었다. 너비 2미터 높이 2미터 정도의 구멍 두 개가 있는 다리 밑. “여기가 젤루 시원해. 내려가 봐.” 굳이 내려가 보고 싶지 않았다. 다른 곳 보다 시원할 게 분명했다. 물도 흘렀다. 국립공원 지역도 아니니 취사도 가능했다. 모든 게 갖춰진 곳이 맞다. 하지만 내가 말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이후에도 이곳 사람들의 다리 밑 사랑은 수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피아골이고 문수골이고 화엄사 계곡이건 간에 다리 밑을 차지한 사람들은 이곳 사람들이다. 그날 야유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네 뒤편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교각 아래 개울가에 사람들이 모였다. 형님들은 ‘최고의 명당’이라며 돌 판에 고기를 굽고 마시다가 전날 막아놓은 개울 웅덩이에서 목욕탕 좌욕하듯 앉아 여름 한낮을 즐겼다.

동네 형님들과 함께 간 야유회. 교각 아래에서 고기를 굽고 술 한 잔씩 돌리며 하루를 보냈다. 이곳 사람들은 다리 밑 그늘을 참 좋아한다.
동네 형님들과 함께 간 야유회. 교각 아래에서 고기를 굽고 술 한 잔씩 돌리며 하루를 보냈다. 이곳 사람들은 다리 밑 그늘을 참 좋아한다.

다들 거나해서 한 자리씩 잡고 오전 낮잠을 청하는데 한 형님이 고기 돌판, 물놀이 모습 등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연신 고무줄 이름의 SNS에 올리고 있었다. 다른 형님이 옆에 앉았다. “뭐 허는가?” “아, 우리덜 노는 거. 친구덜 보라고.” “왜?” “이렇게 더운 날 이 시원한 데서 이러고 있으니 행복하잖은가. 자네는 안 행복한가?” “기분은 좋은데 행복한 건지는 모르겠고.” “아 기분 좋은 게 행복한 거제.” “자네만 행복하믄 됐제 뭐할라고 그런걸 넘들한테 보여주는가?” “왜 시비여?” “아니 그냥. 행복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친구도 있을 텐데, 가난한 사람한테 돈 자랑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싶어서.” “어허 참, 그냥 앨범 삼아 올리는 겨!” “그러면서 밑에 달린 건 뭐할라고 그렇게 뒤져 보는가.” “이 사람 오늘 왜이랴? 친구들이 하도 쪼들려 사니께 이렇게 즐기고 좀 살라고 그러는 겨. 얘네들 보면 아주 그지가 따로 없어.” “이봐 친구. 그지랑 변호사랑 공통점이 뭔지 아는가? 되기는 힘들어도 되고 나면 그렇게 편하다네. 자네는 변호사 되긴 글렀응게 그지쪽으로 한 번 애써보지 그랴.” SNS형님은 툴툴거리며 잠자리를 찾아 일어섰다. 핀잔을 날리던 형님은 그 자리에 누워 곧 잠들었다, 다리 밑이라 그런가. 확실히 시원한 느낌이었다.

경운기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조금만 가면 되는데 뒤에서 차가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경운기를 옆으로 대며 비켜주는데 승용차가 옆에 섰다. 장씨아저씨였다. “얼른 갖다 놔. 농장에 태워다 줄게.” 내내 따라오셨을까? 아니면 시간 맞춰 오신 걸까. “아유 아저씨. 괜찮아요. 감자수확기 떼고 로타리로 갈아붙여야 하니까 시간 더 걸려요. 어여 그냥 가세요.” 아저씨는 잠깐 쳐다보시더니 “알았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댕겨” 하시며 떠났다. 나도 다시 출발하려는데 기어가 잘못 들어가 후진을 하며 다시 정강이 그 부분을 때렸다. 많이 울고 싶었다. 아프기도 했지만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라는 인간은 언제쯤 나아지나 싶었다.

저녁에 들어오니 아들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어떤 스님의 글이었다. 생일선물이란다. 고맙다고 했다. 생일 지난 지 한 달도 채 안돼서 선물을 받다니. 책 안쪽에 편지 글도 있었다. 책을 샀는데 잃어버렸고 다시 사서 줘야지 했는데 늦어져서 미안하단다. 뭔가 잘 잃어버리는 것을 반성하기도 했다. 우산, 지갑은 여러 차례, 심지어는 교복도 잃어버리곤 한다. 사람들은 웬만한 거 아빠 안 닮아서 좋다고들 하는데 잘 잃어버리는 건 쏙 빼 닮았다. 나도 교복 입던 중학교 시절 모자를 일곱 번 샀다. 머리가 커져서가 아니다. 남들은 하나 갖고 졸업하는데 나는 그랬다. 아들 반성문에 나도 반성하고 있는데, 자기가 태어난 것에 감사한다며 마무리하던 끄트머리에 ‘나아줘서 고마워’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열이 올랐다. ‘나아줘서 라니, 내가 언제 아팠냐! 고등학생 맞는 건지 원’

분을 삭이며 책을 들춰보는데 한 글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었다. 열심히 했으니 당연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것은 욕심과 어리석음이란다. 가열해서 덥히는 과정과 무르익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6월 하지보다 8월이 더운 이유도, 한낮 12시보다 2시가 더운 이유도 그러할 것이다.

그래 아들아, 너도 무르익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 아빠도 기다려 보마. 언젠가는 뭔가 좀 나아지겠지. 아빠를 돌아보니 확신은 없다만.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 '원유헌의 구례일기' 모두 보기 ▶ http://bit.ly/1JEeJI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