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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사람 안에 사람 안에 사람 안에 사람

입력
2016.12.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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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지구 반대편 남반구에 살았던 적이 있다. 그곳의 12월은 덥고 환하고, 쨍쨍한 여름 휴가지 냄새가 났다. 그곳에서 나는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12월만 되면 유독 한국이 그리웠다. 앉자마자 탁자에 뜨끈한 어묵 국물을 턱하고 올려주던 정종대포집, 포장마차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수증기, 망년회를 부르는 전화벨, 코끝이 빨개져서 종종걸음치는 사람들, 손으로 적었던 성탄 카드와 새해 연하장, TV 중계로 보던 보신각 종소리…. 더운 남반구가 아닌, 서울 12월의 춥고도 훈훈한 풍경 속에 나도 끼어들고 싶었다.

소원대로 서울에 와서 다시 12월을 맞았다. 이제 나는 아무 때나 정종대포집에 갈 수 있고, 송년회 약속으로 빽빽한 달력을 가지고 있다. 시린 손을 호호 불며 포장마차의 비닐을 들치고 들어가기도 하고, 진작에 산타의 정체를 알아버린 아이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도 한다.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2016년을 보내고 있다. ‘1년이 한 편의 영화라면 지금은’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시간이다. 몇 년 전 송년을 따뜻하게 묘사한 SK텔레콤의 광고에 나온 문장이다.

“일년이 한 편의 영화라면 // 일년이 한 편의 영화라면, 지금은 마지막 장면. / 천천히 어두워지는 화면 위로 / 등장인물과 제작진의 이름을 올릴 시간입니다. // 주인공인 ‘나’와 조연배우들, 그리고 / ‘나의 2007년’이란 영화가 있게 한 / 당신들의 이름을 저물어가는 하늘에 / 자막으로 띄울 시간입니다. // 출연료 한 푼 받지 않고 / 사랑과 우정과 믿음을 보여준 당신들. / 아버지 장우성, 어머니 임정란, / 아내 윤승혜, 친구 박현준, 나대원…/ 말없이 새벽길을 열어주고 / 묵묵히 밤길을 밝혀준 당신들. / 미화원 김태현, 교통경찰 황경진, / 버스기사 우경록, 동네청년 구근철… // ‘장소협찬’과 ‘제작지원’도 빠뜨릴 수 없지요 / 종점식당, 화평세탁소, 골목호프… / 당신들 덕분에 2007년은 / 잊지 못할 영화가 되었습니다. // 당신은 내 영화를 만들고 / 나는 당신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 우리는 공동제작자입니다.” (SK텔레콤 2007년 송년 신문광고 카피)

올해 내가 주인공이었던 나의 영화는 어떤 장르였나 자문해 본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로맨틱 코미디였으면 했지만 공포 스릴러가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다. 솔직히 말해서 남은 내 삶의 장르를 고르라면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는, 클라이맥스 없는 다큐였으면 좋겠다. 아주 기쁜 일이 없는 대신 정말 슬픈 일도 없는, 극적인 반전보다 사소한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시트콤이었으면 좋겠다.

12월이 되어 나는 매일 작별 인사를 한다. 거리를 걸으며, 지하철을 기다리며, 앙상한 나뭇가지에 눈을 줄 때도 혼자 중얼거린다. 안녕 2016년의 날들아, 안녕 지키지 못한 약속들,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들아, 안녕 여전히 서툴고 조급하고 미숙했던 ‘나’들아… 그리고 나만의 송년광고를 만든다.

“사람 안에 사람 안에 사람 안에 사람 / 옆 차가 끼어든다고 빵빵댑니다. / 뉴스를 보다가 욕설을 내뱉습니다. / 까칠한 사람입니다, / 내 안에 있습니다. // 단풍잎을 주워 책갈피에 끼웁니다. / 친구의 생일에 미역국을 끓입니다. / 다정한 사람입니다, / 내 안에 있습니다. // 가끔은 늦도록 잠 못 들어 뒤척입니다./ 같이 마시고 혼자만 취하기도 합니다. / 쓸쓸한 사람입니다, / 당신 안에 있습니다. // 눈 녹을까 아쉬워 냉동실에 넣어 둡니다. / 하고 싶은 일 대신 해야 하는 일을 합니다. / 그리운 사람입니다, / 당신 안에 있습니다. // 그립고 쓸쓸하고 다정하고 까칠한 사람. /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 내 안에 있는 수 많은 당신입니다. // 버리고 싶다가도 다시 보듬게 되는 나들, 당신들 / 한 명 빠지지 않고 모여 / 해를 보내고 해를 맞이합니다. // 사람 안에 사람이 있어 또 한 해 살았습니다. / 사람 안에 사람이 있어 또 한 해 살겠습니다.”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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