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남측으로 680m 지점에 있는 경계초소. “동무는 날 죽이지 못하디.” 무장을 한 채 남측으로 넘어온 북한의 안정준(지승현) 상사는 유시진(송중기)대위와 격투를 벌이다 “남조선은 여기저기 눈치 보는 데가 많아 먼저는 총을 못 쏘지 않네”라고 이죽거린다. 총을 먼저 쏘는 쪽이 정전협정 위반 책임을 지는 걸 이용해, 북한군이 유 대위를 도발한 것이다. 북한군 3명이 남쪽으로 넘어와 아군 2명을 억류해 특전사로 투입된 유 대위는 단도를 휘두르며 북한군과 치열한 몸싸움을 벌인다. 지난달 24일 첫 방송된 KBS2 수목드라마 ‘태양의 후예’ 1회 초반에 나온 장면이다.
중국 시청자들은 볼 수 없는 ‘태후’ 북한군
뽀얀 피부에 미소년 이미지가 강했던 송중기의 반전 매력을 볼 수 있는 이 장면을 중국 네티즌은 현지에서 볼 수 없다. ‘태양의 후예’ 제작진이 3분이 넘는 남·북 군인 간 대결 장면을 들어낸 뒤 중국에 유통(포털사이트 아이치이)해서다. ‘태양의 후예’ 제작을 총괄하는 함영훈 KBS PD는 30일 “북한 관련 소재는 민감할 수 있어 이 장면을 빼고 지난해 말 중국에 사전 심의를 넣었다”고 말했다. 방송 콘텐츠에 대한 중국 정부의 사전 심의가 워낙 까다롭기 때문에 정치적 이슈가 담긴 내용을 아예 빼버린 것이다.
또 다른 ‘태양의 후예’ 관계자에 따르면 드라마 12~14부 사이 1회에 나왔던 북한군이 한 번 더 나오는데, 이 북한군의 국적을 중국에서는 노출하지 않는다. 유 대위가 파병을 간 우르크처럼 가상의 국가 이름을 자막으로 달아 따로 편집한 영상을 중국에 보냈다. ‘태양의 후예’ 제작사인 NEW(뉴)에 따르면 드라마는 이날까지 미국과 영국, 일본, 이란 등 32개국에 판권이 팔렸는데, 한국 방송 내용과 다른 영상이 유통될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
‘아빠!어디가?’ 등은 제작 돌연 중단… 中심의에 비상
‘태양의 후예’ 제작진들만 중국 정부의 심의 눈치를 본 게 아니다. 한국산(産) 예능 프로그램에도 잇따라 비상이 걸렸다. MBC가 지난 2013년 중국 후난위성TV에 포맷을 수출해 현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아빠! 어디가?’ 시즌4의 방송이 이달 돌연 취소돼 업계를 발칵 뒤집어 놨다. 방송 심의를 담당하는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광전총국)이 ‘미성년자의 리얼리티프로그램 출연 엄격한 통제’란 방침을 최근 발표해서다. 중국에 머물고 있는 김기헌 한국콘텐츠진흥원 중국사무소 소장은 “연예인의 2세가 나와 화려한 생활 모습을 보여주고 또 이로 하여금 허황된 꿈을 꾸게 한다는 취지에서 내려진 규제”라고 전했다.
‘아빠! 어디가?’시즌4는 방송 전 기업 협찬 광고비로 15억 위안(약 2,670 억원)을 끌어 모을 정도로 현지에서 파급력이 높은 프로그램이었는데, 정부의 입김으로 좌초위기에 처한 셈이다. MBC관계자는 “현지 방송사와 대안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지난 7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인터넷 매체인 인민망에 따르면 KBS가 중국 저장위성TV에 포맷을 수출한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중국판 ‘아빠가 돌아왔다’의 제작도 중단됐다. MBC가 중국 장쑤위성TV에 포맷을 수출한 ‘우리 결혼했어요’(우결)의 중국판 ‘우리 사랑하기로 했어요’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중국 방송 시장에 정통한 현지 관계자는 “중국에 ‘우결’ 과 비슷한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이 많은데, 스타들의 가상 결혼을 문제 삼아 관련 제작을 못하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걸로 안다”며 “한 방송사는 ‘올바른 연애 지침서 같은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도 내고, 일반인을 출연시켜 환상을 덜겠다는 계획도 발표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한국산 예능프로그램의 잇따른 현지 방송 규제에 한국 제작자들 사이에서는 “중국 정부의 새로운 한류 억제 움직임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중국 방송사와 예능 프로그램을 공동 제작한 경험이 있는 국내 대형 외주제작사 대표는 “중국에선 한국 프로그램이 잘 될 때마다 규제가 새로 생겨난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중국의 방송 심의 규제 내용이 ‘과학에 위배되는 내용’ 혹은 ‘국가 종교 정책에 위배되는 내용’ 식으로 너무 포괄적인데다, 심의 규제 방향이 어디로 튈지 몰라 더 난감하다는 게 공통된 목소리다. 지난 2월부터 중국 안휘위성TV에서 방송을 시작한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속 도민준(김수현)은 직업이 소설가로 바뀌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외계인이란 설정이 미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다.
웹드라마와 웹예능 같은 웹 콘텐츠에 대한 중국 정부의 심의 강화 방침도 새로운 복병이다. 김 소장은 “광전총국이 웹콘텐츠도 TV 프로그램과 같은 심의 절차를 밟겠다는 입장을 올해 초에 낸 만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나영석 CJ E&M PD가 연출하고 강호동 등이 출연한 웹예능 ‘신서유기’ 시즌2 제작진도 긴장하고 있다. ‘신서유기’ 시즌2를 제작하는 tvN 측은 “아직까지 심의 관련 중국 유통사 측에서 특별한 요청을 한 건 없다”면서도 “웹콘텐츠의 심의 관련 변화를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신서유기’ 시즌2는 내달 19일 한국과 중국 포털사이트(QQ)에서 동시에 공개된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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