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태섭 기자

등록 : 2018.07.12 04:40

“자기야! 저녁 뭐 해먹을까” VS “남은 일 집에서 하는거 알지?”

주 52시간제 시행 열흘 '빛과 그림자'

등록 : 2018.07.12 04:40

“칼퇴! 워라밸 속으로”

퇴근 후 ‘업무 카톡’ 노심초사 끝

문화센터로 영화관으로 ‘취미활동’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 즐거움

쌀ㆍ김치ㆍ고기 판매량 크게 늘어

오전 학원족 등 유연근무 새 풍속

“주 52시간, 빛 좋은 개살구”

10시간 일하니 ‘잔업 과다’ 경고

외부서 사내망 접속 근무 ‘꼼수’

줄어든 근무만큼 업무강도 세져

점심시간 식당 손님 크게 줄어

임금 줄어 “저녁밥 잃었다” 자조도

지난 1일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 지 열흘 가량 지나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 다양한 변화들이 감지되고 있다.일터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진 직장인을 겨냥한 문화 프로그램, 가정ㆍ간편식 등이 늘어나는가 하면 직장가 주변 식당은 매출 급감에 울상이다. 제도는 시행됐지만 여전히 이른 출근과 퇴근 후 집ㆍ카페에서 업무를 보는 경우도 이어지고 있다. 52시간제가 단기간에 몰고 온 빛과 그림자를 짚어봤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이후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가 평일 저녁에 개설한 강좌에서 직장인들이 그림을 배우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제공

평일 저녁 백화점 문화강좌 30% 늘어

지난 10일 오후 7시, 서울의 한 백화점 문화센터에 젊은 직장인들이 모여들었다. 휴가를 앞두고 요가ㆍ여행사진ㆍ요리강습 등 다양한 강좌를 듣기 위해서다. 이달부터 PC오프제를 시작한 유통업체에 다니는 정모(27)씨는 “평소 배우고 싶던 중국어 강좌에 등록했다”면서 “저녁 시간에 팀장의 업무 지시 연락이 올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이처럼 ‘칼퇴근’을 보장받게 된 직장인들의 저녁 풍경이 빠르게 바뀌면서 당장 백화점들이 분주해졌다. 이달 들어 현대백화점의 평일 오후 6시 이후 문화센터 강좌 이용 고객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8% 증가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이달 저녁 시간대 강좌를 작년보다 30% 추가 개설했다”고 밝혔고, 신세계백화점 측도 “신규 강좌 92개를 평일 퇴근시간에 집중 배치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여타 문화 활동도 크게 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6월 마지막 주 평일 하루 평균 관객 수(31만4,000여명)에 비해 7월 첫째 주 관객 수(43만7,000여명)가 39% 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 퇴근으로 외식보다 ‘집밥’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온라인 쇼핑사이트 G마켓의 신선식품 판매량도 급변했다. 이달 1~9일 사이 쌀과 김치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20~40%, 소고기ㆍ돼지고기 등 육류는 60~90% 판매량이 증가했다.

유연근무제를 활용한 ‘수시 바캉스’도 늘어나는 추세다. 2주간 80시간만 채우면 자유롭게 근무 조정이 가능한 SK텔레콤 직원 김모(36)씨는 월~목요일 사이 더 일하고, 금요일은 오후 1시에 퇴근해 2박3일의 여행을 다녀오는 식으로 근무표를 짰다. 신라호텔 관계자는 “야외 수영장 야간 이용 혜택이 포함된 패키지의 7월 예약률이 지난해 대비 약 2배 늘었다”고 전했다.

한때 근면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조기 출근’ 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지난달까지 하루 업무량을 감안해 오전 7시 출근을 반복하던 자동차 대기업 직원 A씨는 이달 들어 오전 9시~오후 6시의 유연근무제를 택하면서 오전 8시로 출근시간을 늦췄다. 그는 “아직 눈치가 보여 당당하게 9시 출근을 하는 사람은 적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기 출근 문화가 자연스레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예전엔 볼 수 없던 ‘오전 학원족’이 생긴 것도 새로운 풍경이다. 르노삼성차에 근무하는 30대 박모씨는 최근 영어학원에 들린 뒤 오전 10시까지 출근한다. 주 52시간제 이전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박씨는 “출ㆍ퇴근 시간을 자율적으로 정하기 시작하면서 남는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고 말했다.

11일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간 서울 중구 을지로 직장가의 한 카페 테라스가 텅 비어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후 직장인들의 점심시간도 짧아졌다. 배우한 기자

야근ㆍ회식 기피 문화에 직장가 식당들 된서리

‘회식은 근로시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고용노동부의 유권해석에 따라 최근 회사 밀집 지역 상권은 직격탄을 맞고 있다. 서울 여의도에서 돼지고기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퇴근 후 들르는 저녁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다”며 “줄어든 근로시간만큼 업무 강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점심시간 손님도 확연히 감소했다”고 호소했다.

현대자동차 본사는 이달 중 구내식당의 석식 제공을 중단할 방침이다. 실제 식품전문기업 현대그린푸드가 이달 1∼6일 기업의 단체급식 식자재 발주량을 점검한 결과, 점심용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 늘어난 반면, 저녁용은 0.3% 증가하는데 그쳤다.

이런 움직임은 석식 제공이 불필요한 야근을 유발하는 요인이란 판단 때문인데, 이를 두고 일각에선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미혼ㆍ맞벌이 부부에겐 저렴한 구내식당이 생활의 적지 않은 복지 요인인데, 일방적인 중단은 오히려 횡포라는 것이다.

현실을 외면한 제도 변화에 대한 불만도 여전하다. 유명 전자 회사에 다니는 B연구원은 최근 이틀 연속 하루 10시간씩 일했다가 회사로부터 ‘잔업 과다 우려자’라는 경고성 메일을 받았다. 그는 “업무란 게 주어진 일정이 있는데, 무조건 퇴근시간을 맞추다 보면 일이 쌓일 수밖에 없다”며 “자발적인 야근도 눈치를 봐야 할 처지”라고 우려했다.

여전히 사실상 퇴근 후 업무를 종용하는 회사들도 있다. 대형화학회사에 다니는 B씨는 “주 52시간 적용 직후에는 전산으로만 퇴근으로 체크하고 회사에 남아 일하라고 했다가 최근엔 집에 가서 나머지 업무를 처리하라고 한다”고 전했다. 그는 “외부에서 사내망에 접속해 일 할 수 있게 만든 시스템이 주 52시간을 겨냥한 꼼수로 느껴질 정도”라고 한숨을 쉬었다.

형편이 다른 근로자 사이의 양극화 조짐도 감지된다. 사무직과 달리 초과수당이 임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생산직 노동자들은 근로시간 단축으로 실질적인 임금이 줄어들자 ‘저녁이 있는 삶이 열리면서 저녁밥을 잃었다’는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한 화학회사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임금 변화가 크지 않은 사무직과 임금이 줄어든 생산직 간 갈등 소지가 있어 노동조합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길 조심스러워 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한편 2013년부터 동결(기본금 3,000원)된 택시요금 인상을 추진 중인 서울 택시업계는 현재 자정부터 오전 4시까지인 할증시간을 오후 10시부터로 앞당기는 대신, 추가 요금을 일부 인하하는 방안 등을 요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변태섭 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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