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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날로그식 생존법

입력
2018.02.21 16:1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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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아침부터 아내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늦잠을 자다가 나온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물이 나오지 않는단다.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우리 마을은 산 밑에 관정을 뚫어 마을 자체적으로 상수도를 설치해 물을 공급해 왔다. 그 동안 물 때문에 걱정한 기억이 없다. 이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겨울가뭄이 심해 단수를 하고 있단다. 갑자기 단수가 되자 쌀 씻을 물이나 설거지할 물도 없고, 당장 수세식 변소를 사용할 수도 없게 됐다. 나는 곧 읍내에 나가 급한 대로 식수 몇 병을 사왔다. 용변은 물이 나올 때까지 뒤란의 텃밭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읍내에서 물을 사오면서 문득 얼마 전에 본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가 떠올랐다. 어느 날 까닭을 알 수 없는 대규모 정전사태로 전기가 공급을 멈추자 사람들은 대혼란에 빠진다. 도쿄에 사는 평범한 스즈키 가족도 처절한 생존 투쟁에 직면했다. 전기가 끊기자 전기와 연결된 시스템과 기차, 자동차, 가스, 전자기기가 동시에 멈췄다. 당연히 회사와 학교에는 갈 수 없고, 식량도 고갈되고, 심지어 물도 마실 수 없다. 한 순간에 문명의 편리함이 사라져버린 것. “도쿄에 있으면 위험해!” “물을 확보할 수 있는 산으로!”

결국 스즈키 가족은 도쿄를 탈출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시골 바닷가에 있는 어머니의 고향에 갈 계획을 세운다. 힘들게 공항에 도착했지만 비행기가 뜨지 못한단다. 어렵사리 자전거를 구한 가족들은 긴 여정을 떠난다.

설상가상으로 커져가는 재난영화의 문법 속에서 ‘서바이벌 패밀리’가 당도한 곳은 단순히 어머니의 고향인 어촌마을이 아니다. 도시 문명의 허술함을 풍자하면서 가족들이 난국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삶을 비판하는 것이 그 목적임을 보여준다.

첨단문명의 눈부심에 도취해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인류가 일군 문명이란 것의 토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실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만일 전쟁이나 지진이나 핵폭발 같은 재난으로 전기가 끓기면 당장 우리의 생존은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문명에 길든 우리는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문제 될 게 없다고 여기지만, 극한의 재난에 직면하면 돈보다 식량과 물 같은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에도 나오지만, 평소 아날로그식 삶을 훈련해 온 한 가족은 자전거로 여행하며 엄청난 재난을 즐기고 있다. 그 가족은 대자연에서 먹을 것을 찾아내고 물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 대부분의 도시인들은 마트에서 돈을 주고 채소를 구해 먹을 줄은 알았지만, 산과 들에서 먹을 수 있는 식물을 구할 수는 없다. 왜? 어떤 풀이 먹을 수 있는 풀인지 알지 못하니까. 산이나 들에 있는 풀은 그냥 쓸모 없는 잡초라고만 생각해 왔으니까.

그래서 우리 가족은 몇 년 전부터 대자연에서 거저 얻을 수 있는 잡초를 뜯어먹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른바 아날로그식 생존법을 훈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따로 농사를 짓지 않고 산과 들에서 자라는 풀들을 뜯어먹으며, 그런 풀들을 먹을 수 있는 요리법도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디지털 문명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우리 가족의 그런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편리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불편과 느림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불편과 느림의 삶도 길들여지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우리 가족은 물을 아끼려고 여러 해 전부터 요강을 사용하지만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지금도 원전 수십 기가 가동되는 우리 삶의 토대는 얼마나 위태위태한가.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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