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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사람 잘못 쓰는 재주

입력
2016.07.1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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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 막말 파문을 일으킨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배우한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막말 파문을 일으킨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배우한 기자

“우리나라 교육이 왜 이렇게 개판인가 했더니 이유가 있었군요. 학생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개 돼지로 보였으니 양육하지 않고 그렇게 가혹하게 양식을 했던 것이군요.” “왜 개 돼지들이 주는 월급을 받고 사십니까? 1%들끼리 월급도 주고 받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99% 민중은 개ㆍ돼지’ 막말에 국민들의 신랄한 패러디 행진이 이어진다. 하루 아침에 개, 돼지가 돼버린 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급기야 교육부는 12일 나 전 기획관의 파면을 인사혁신처 중앙징계위원회에 요구하기로 했다.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일찌감치 요구했던 바이고, 이미 시민 학부모 등 3만여명이 그의 파면요구서에 서명했다. 그래도 공무원에게 적용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징계인 파면 요구는 이례적이다. 공무원 품위 유지 위반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있지만 그간 막말을 이유로 징계한 선례는 없다. 정무적 책임을 져야 하는 장ㆍ차관도 아니다. 그가 징계위에서 파면 결정을 받아도 해고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 우리나라 법 제도에 의해 구제될 가능성도 있다. “취중 실언”이 공무원의 권한을 악용해 거액의 뇌물을 수수하는 것만큼 심각한 비위가 아니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말실수의 문제일까. 본질은 신분주의를 욕망하는 공직자 양심의 문제다.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1%와 99%의 신분제 사회를 국가정책을 입안하는 고위 공무원이 신념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이 진짜 심각하다. 많은 이들이 냉소 어린 댓글에서 말하듯이 대다수 국민을 사육과 계도의 대상으로 보는 공직자가 국가 교육정책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국민에 봉사해야 할 공무원이 국민을 배신한 사실에 분개한 것이다.

나 전 기획관처럼 “나만 1% 안에 들면 된다”고 믿는 이들도 있겠지만, 갈수록 심화하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1%를 포함한 공동체 전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사회불안요소다.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불공평한 세상에서 태어나 아무리 노력해도 1%가 될 수 없다는 믿음이 확산된다면, 공동체 구성원들은 제도를 존중하지 않게 된다. 개, 돼지처럼 사육당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외환위기에 장롱 속 금반지와 금메달까지 탈탈 털어 들고 나올 턱이 없다. 납부한 만큼 누리지 못한다는 생각에 세금이든 건강보험료든 아끼기 위한 편법 탈법이 판을 칠 것이다. 가장 반사회적인 일부는 사회구조적 모순을 탓하며 교육이나 시험이 아닌 범죄행각을 자신이 얻어낼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로 여기게 된다.

그러니 나 전 기획관의 그릇된 가치관은 징계의 대상이 아니라 애초에 공무원으로서 발을 들여놓지 않도록 막아야 했던 결격사유다. 양심과 신념은 그 자체로 처벌할 수 없다, 그가 공직자만 아니라면. 그러나 국가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신념 형성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교육부 공무원이라면 신분제 옹호의 양심은 보호받을 가치가 없다.

어쩌다 이렇게 반교육적 가치관의 보유자가 교육부 고위 공무원에 올랐는지, 그를 걸러냈어야 할 인사시스템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한탄스러울 뿐이다. 얼마나 더 많은 공직자가 ‘그릇된 신념’을 가슴 속에 품고 일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아찔하다. 성추행 파문으로 물러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부터 식민지배를 옹호한 문창극 전 총리후보자까지 드러난 사례는 너무 많다. 사람 잘못 쓰는 재주마저 있어 보인다. 최소한 얼토당토 않은 인물이 국가 주요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 나 전 기획관 파면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하는 이유다.

김희원 사회부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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