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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그때부터 우리는 살게 된다

입력
2015.11.18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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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글은 지난 7일과 8일 광화문의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언리미티드 에디션’ 참관기가 될 예정이었다. 나와 후장사실주의자들은 ‘analrealism vol. 1’이라는 제목을 가진 문예지 아닌 문예지를 가지고 참가했다. 즐거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 일주일 후, 그러니까 지난 14일 광화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 때문이다.

나는 그날의 참상을 뒤늦게 접했고 당연히 화가 났다. 하지만 동시에 무력감도 찾아왔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정확히 말해 무슨 말을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익숙한 회의에 사로잡힌 것이다.

별 수 없이 나는 책을 펼쳤다. 한심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이먼 크리츨리의 ‘믿음 없는 믿음의 정치’. 종교적 광신과 정치적 냉소주의에 맞서 어떻게 연대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사유하는 크리츨리는 진정한 정치를 실행하려면 믿음을 다시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어떤 믿음인가다.

크리츨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선을 행하고, 너희들을 악의에 차서 이용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마태복음 5장 44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렇게 쓴다.

“그리스도가 이렇게 말할 때, 이 무한한 윤리적 요구를 할 때 그는 무언가가 단순히 충족되거나 실행되리라고 진술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신의 육화였든, 아니면 점령지 팔레스타인에 살던 골칫거리 랍비였든, 짐작컨대 그리스도는 단순히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이 무한한 요구를 목적 삼아 표현하지도 않았다. 같은 설교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복음 5장 48절)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는 적어도 이번 생에서 그런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한 순간도 상상하고 있지 않다.…그런 요구는 우리의 불완전과 완전한 실패를 노출한다. 우리는 무한한 요구라는 사실과 유한한 상황이라는 제약에 처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달리 말해 윤리란 실패의 경험에 관한 온갖 것이다. 하지만 실패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게 되고 깊은 구렁 속에서, 심연으로부터 무언가를 경험한다. 여기서 양심의 본성 혹은 내가 ‘인간이 되는 것의 무력한 힘’이라 부르려는 것이 드러난다.

무한한 윤리적 요구란 우리가 너무나 인간적이라는 것을 아는 데도 할 수 없이 비대칭적이고 충족시킬 수 없는 요구(말하자면 그리스도처럼 되라는 요구)를 따라 살게 하고 그러면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가능해지는 주체가 되도록 만든다. 설령 우리가 관습적 도덕성과 확고한 법의 제한적 형식주의와 전통 종교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한들 저 ‘타인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 부정직한 필연성’으로부터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믿음의 체험을, 믿음 없는 이들의 믿음을 필요로 한다. 믿음 없는 이들의 믿음이란 사랑,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고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는 것을 받는 일로서의 사랑에 열려 있음에 다름 아니다.”

내가 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한 것 같지 않다. 다만 그는 내게 프랑스 소설가 르네 도말을 떠올리게 했는데, 도말은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를 이렇게 썼다. “주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한다.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하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한다.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살게 된다.”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나는 살고 싶다. 문제는 어떤 삶이냐다. 나는 거기서부터 생각해나가기로 했다.

금정연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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