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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두 명의 선배

입력
2017.01.26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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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고등학교 삼학년인 아들이 다니는 학교는 충주고등학교다. 작은 지방 도시의 학교가 더러 지면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물론 대선주자로 이름을 올린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때문이다. 그가 졸업한 학교이고, 그의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가 신화처럼 부풀려 떠돌기도 한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들으면 믿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그 고등학교 기숙사 이름이 반기문 학사이고, 소위 서울의 일류 대학교를 목표로 맹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 또한 그 곳이다.

아들 녀석은 아비의 영향을 받아 꽤나 시니컬한 편이어서, 학교에서 제 아무리 훌륭한 선배라고 해도 그저 시큰둥할 뿐이다. 주위의 친구들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요컨대 ‘그래서 뭐?’ 세대라고나 할까. 사실 동향 출신 인사니, 학교 동문이니 하는 것을 빌미로 씩둑꺽둑하는 것은 나이 든 구세대거나 우스꽝스러운 ‘촌놈 근성’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의 귀국에 맞추어 지역에서 대대적인 환영 행사가 열리고 비례임이 분명한 과공의 플래카드가 곳곳에, 심지어 학교 담벼락에도 붙자 아들 녀석이 질문을 해왔다. 아무래도 출신 학교다 보니 교실에서 논쟁이 붙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질문이란 단순하게 친구들과 정치적인 논쟁을 할 때 어떤 포인트를 잡아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특별히 정치적인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우물쭈물 즉답을 해주지 못하고 그 날 저녁 한 통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다음은 꽤 긴 편지 중 일부다.

‘……외국어 학원 따위가 있을 리 없던 그 시절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충주비료 공장의 외국인 기술자들을 찾아 다니고, 그런 노력 끝에 미국에 초청되어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모범생에서 다시 모범 공무원으로, 끝내 유엔 사무총장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경력은 네 학교의 어떤 동문도 이루어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선배라면 오직 그 사람만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난 네가 들어본 적도 없고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또 다른 너의 선배 이야기를 해주고 싶구나.

그의 이름은 심광보란다. 그 동안 한 번도 그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것은 그가 이미 고인이고, 그것도 바로 네 나이 정도에 스스로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숭고한 뜻이 있더라도 자결을 미화하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뜻을 되새기는 것은 오롯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란 걸 이해해주기 바란다. 심광보 선배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네가 다니는 학교에 입학했단다. 하지만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이학년 때 휴학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학교는 자퇴를 종용했고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학교 교육의 부조리함에 눈을 떴고 이후 돈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며 학교보다 더 넓은 사회의 부조리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990년, 그는 이 땅의 농민, 노동자, 학생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쓰고 충주 시내 한복판 건물 옥상에서 분신 자결하고 말았다. 그 때가 18살이었다. 민주주의와 참교육을 외치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던졌지만 심광보 열사의 죽음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교실에서 가끔 벌어진다는 정치 이야기가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다. 반기문이나 선거 연령 등이 주제가 아닐까 싶은데 어떤 것이든 토론과 논쟁은 좋은 것이다. 나는 너희들이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기 때문에 두 명의 선배, 그러니까 커다란 꿈을 품고 미국으로 갔던 고등학생과 스스로 몸을 불살랐던 또 다른 고등학생에 대한 이야기도 사려 깊게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선거 연령은 당연히 낮추어져야 하겠지?

무엇보다 너희에게 많이 부끄러운 민주주의를 보여주어 미안하구나. 하지만 너희 세대의 민주주의는 너희가 만드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언제나 새로 태어나는 것이란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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