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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28 07:00

스탬프투어도 아닌데...말레이와 브루나이 사이

[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88)]코타키나발루~반다르세리베가완 렌터카 여행②

등록 : 2017.12.28 07:00


※어서 와 브루나이는 처음이지?

에서 이어집니다.

우리 사전엔 불가능이 많은데…하루에 여권 두 페이지를 스탬프로 가득 채우는 일은 가능했다.

렌터카가 넘어야 할 4번의 스탬프 찍기 고개.

브루나이 국경 넘기의 교본은 어느 프랑스 블로그였다. 자간과 행간을 생략한, 무려 A4용지 3페이지에 달하는 정보였다.

하찮은 지명 하나 놓치지 않은 논문 수준의 여행기였다. ‘단순한 게 최고(Simple is the best)’라는 명제는 우리 일상뿐 아니라 정보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을. 렌터카의 창문을 열고 손을 뻗어보았다. 후끈한 공기만이 숨 막히게 했다.(*이하 출입국관리소 기준 말레이시아는 MY, 브루나이는 BR로 표기)

제1막:코타키나발루 국제공항~신두민(Sindumin,MY)·메라폭(Merapok,MY)

공항을 빠져 나와 첫 목적지는 출입관리소가 있는 신두민이다. 총 여정의 평균적인 도로 사정과 비교하면 첨단이라 할 만한, 좋게 말하면 고속도로다. 하지만 쓰러져가는 집, 공사 현장, 폐차들, 토속품 가판대, 사시나무 숲 등 스쳐가는 풍경은 큰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단, 한국의 중국집처럼 흔한 중국인 교회의 간판이 호기심을 끌었다. 십자가는 방치돼 있고, 교회라기보다 철거를 앞둔 집 같았다. 여기는 말레이시아다.

말레이시아의 신두민 출입관리소를 통과할 때는 국경도 아닌데 국경을 통과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차에 탑승한 채 여권을 내미니(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스탬프를 꽝 찍는다. 어안이 벙벙하다. 고작 몇m 앞 사무소에서 또 찍는다. 같은 말레이시아인데 사바(Sabah)주와 사라왁(Sarawak)주를 남의 나라처럼 분리하는 스탬프다. 세모와 네모꼴 스탬프는 사바의 신두민에서 사라왁의 메라폭 입성을 알렸다.

신두민·메라폭 출입관리소. 긴장감 0%, 탑승한 채 여권을 내밀면 OK.

단체로 찍어낸 듯 똑같은 디자인의 교회 푯말이 쓸데없는 것에 관심 많은 우릴 유혹했다.

실체는 ‘우리의 관심이 정말 쓸데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뿐이었다.

이 여정의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면,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의 표지판이 있는 것.

나중에 코타키나발루의 숙소 주인장에게 들었다. 사바와 사라왁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단다. 사바 주민이 사라왁주에 가려면 90일 체류 허가를 받아야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90일을 넘긴다고 처벌이 엄한 것은 아니지만, 경고와 함께 귀찮은 서류 작업이 필요하단다. 역사적으로 사라왁주는 브루나이 땅이었으나 영국인 제임스 브룩에게 도매금으로 넘겨진 뒤 현재 말레이시아령으로 되어 있다. 여행자든 말레이시아 사람이든 이 주 경계 앞에서만큼은 평등하다. 여권에 도장은 찍었지만 우린 여전히 말레이시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제2막:메라폭(Merapok)~멩칼랍(Mengkalap,MY)·라부(Labu,BR)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을지, 도전 정신이 살짝 펌프질한 여정의 초반. 배경 음악은 ‘My Way’

팜트리 농장을 가까이에서 보면, 꼭 산이 만들어낸 분수 같다.

톨게이트 같은 라부의 출입국관리소. 명실공히 브루나이의 첫발인데, 싱겁게 끝나버리는 기분이 든다.

사라왁주에 진입하자마자 우릴 맞이한 건 팜트리다. 이 때문에 차를 렌트해야 한다고 할 자신은 없지만, 여정 중 가장 드라마틱한 풍경이다. 양 옆으로 팜트리가 빼곡한 2차선 도로는 구불구불하고 순탄한 드라이브 길이다. 물집 잡힐 엉덩이를 쉬게 한 것도 이쯤이다. 규모를 가늠하기 힘든 팜트리 농장이 초록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어를 한다면 ‘알.쓸.신.잡’에 출연시키고 싶은 탕탕은 팜트리의 무분별한 벌채로 인한 지구 환경을 걱정하고 있었다. 난, 우리 걱정이 태산이었다.

드디어 누구나 인정할만한 첫 국경에 닿았다. 지붕 장식에 신경을 쓴 말레이시아 멩칼랍 출입국관리소다. 그곳에서 고개를 살짝 넘으면 톨게이트 같은 곳이 나온다. 브루나이에 첫발을 내딛는 라부 출입국관리소다. 이런저런 트집을 잡지 않을까 조금은 쫄았다. 무슬림 국가에 대한 막연한 무지가 잘못된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있었다. 여권을 내미니 뜻밖에 무사통과다. 그저 스탬프 위에 또 스탬프, 무엇이 처음이었고 나중이었는지 분간이 힘들다. 벌써 4개째다. 이제 브루나이다.

제3막:라부(Labu)~우중잘란(Ujung Jalan,BR)·판다루안(Pandaruan,MY)

모든 출입국관리소 중 각이 잘 잡힌 우중잘란. 처음으로 차량 허가증 작업이 진행된다.

차 서랍을 잘 털면 어딘가에서 나타날 차량등록증(좌)과 새로 받은 허가증(우). 아, 허가증에도 스탬프가 찍혔는데…그러면 9개?

브루나이의 공식 명칭은 ‘네가라 브루나이 다루살람’이다. 풀이하자면 ‘평화의 나라’다. 독립한 해가 1984년, 놀라울 정도로 최근이다. 면적은 5,765㎢, 제주도를 세 덩이 뭉친 것보다 조금 더 크다. 국토의 75%가 열대 정글인데, 코타키나발루에서부터 맛을 보며 달려왔기에 딱히 브루나이만의 느낌은 없었다. 때때로 모스크가 보이고, 쓸데없이 창문이 많은 고급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우린 말 수가 줄었다. 캄풍푸니를 지나 넓고 조직적으로 보이는 출입국관리소로 차를 몰았다.

여느 때처럼 탑승한 채 여권을 내밀었다. 좀 시크한 척했는데, 손을 내젓는다. 차를 가리키며 종이 한 장을 내어줬다. 임시 차량 허가증이었다. 엔진, 차량, 새시 등 써야 할 번호만 한 다스인데, 우리가 가진 건 렌터카 업체에서 받은 영수증뿐이다. 고개만 갸우뚱하는 그녀의 행동에는 ‘무엇을, 어떻게’가 빠져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차 서랍 안에 있는 서류란 서류는 다 끄집어내 적극 협조했다. 한국으로 치면 차량등록증이 있어야 했다. 신고도 못한 채 뒤 차에 떠밀려 가니, 히잡 쓴 다른 여인이 여권에 스탬프부터 찍는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스탬프가 먼저였다. 차량 허가증에도 결국 스탬프가 찍혔다. 쾅!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말레이시아로 입국하는 판다루안에서 또 찍혔다. 쾅, 쾅!

제4막:판다루안(Pandaruan)~테둔간(tedungan,MY)·쿠알라루라(Kuala Lurah,BR)

그들은 프랑스를 사랑하는 걸까, 그래서 넉넉하게 90일 체류를 허락하나. 쿠알라루라 출입국관리소 직전의 프랑스어 환영 인사.

술병도 구르고, 페트병도 구르고, 차도 굴러가고 있었다. 브루나이행 마지막 스탬프가 저 앞에서 찍힌다.

출입국신고서에 마약을 경계하는 죽음의 경고 문구가 있음에도 짐 검사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해외에서 그저 익숙한 것을 본 이유만으로 안심하는 날이 있다. 재수가 되게 없는 날이 그렇다.

우린 브루나이와 말레이시아 사이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다시 말레이시아다. 테둔간 출입국관리소를 지나니, 브루나이로 가는 마지막 고지가 눈앞이다. 평일임에도 차가 꽤 밀렸다. 서로 먼저 가겠다는 이기심이 이중, 삼중 차선을 만들었다. 브루나이의 엄격함을 견디지 못한 혈기가 말레이시아로 넘어왔다가 되돌아가는 연유도 있을 것이다. 브루나이에선 술과 담배 판매 자체가 금지다. 이곳 쿠알라루라와 우중잘란 국경 사이에 낀 말레이시아의 림방(Limbang)에는 다행히도 인간의 욕구를 불사를 수 있는 마을이 있었다.

드디어, 다시, 브루나이 입국인가. 브루나이 출입국신고서를 받은 것도 처음, 차에서 내려 스탬프를 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희희낙락 수다 삼매경에 빠졌던 사무소 직원은 프랑스 국적의 탕탕에게 90일, 한국 국적의 나에게 30일 체류 스탬프를 찍었다. 나태한 듯 쾌활한 국경을 지나 시내로 속도를 냈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 짐 검사는 안했네?!?!” 마약을 소지한 것만으로 목이 날아가는 나라라면, 마약탐지견 한 마리쯤 차 주변을 킁킁대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릴 그저 선량한 국제인으로 봐준 걸까. 이것도 알라의 뜻이었을까. 인샬라!

공항에서 출발한 지 6시간이 훌쩍 넘고 있었다. 수척해진 눈에도 브루나이의 수도 반다르세리베가완 표지판이 보였다. 우리가 탄 경차를 기죽이는, 호화로운 차들이 도로를 쌩쌩 달린다. 저 멀리 사진으로만 보던 자미 아스리 볼키아 모스크의 금싸라기 돔도 번쩍거렸다. 그런데 우리의 숙소는 어디쯤일까. 정보의 창고인 휴대폰은 방전 상태요, 어쩌다 만난 경찰은 무늬만 경찰이었다. 그는 없을 리 없는 인포메이션 센터의 위치조차 알지 못했다. 여긴 어디이고, 우린 누구인가. 도로 한복판에서 (우리가 아는) ‘커피빈’이 있다는 사실 하나에 안도한 첫날이었다.

강미승 여행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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