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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봄날, 가 보지 않은 길을 간다

입력
2017.03.30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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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강물로 온다. 꽃샘추위라는 겨울의 앙탈 속에서 잠자던 강물이 버들강아지의 솜털만큼 눈을 뜬다. 진통 속에 태어나는 아이와 함께 쏟아지는 양수처럼 강은 이미 봄의 생명력으로 꿈틀거린다. 매화꽃 피기 전 통통한 꽃망울의 붉은 심장 같은 탄력성은 하늘을 들었다 놓는다. 지난 겨울도 따듯했다. 한강도 한 번 제대로 얼리지 못했다.

이른 봄 수목원 반송 가지치기를 하면서 녹색의 푸르름에 눈을 적신다. 왜 수목원을 하며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물으면 이제 그냥 웃어야 한다. 가 보지 않은 길에 부러움은 없다. 내가 선택한 길이 고달프더라도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막다른 길에 이른 나이 때문이다. 사람보다 사랑을 더 아는 것 같은 3,000그루의 반송들이 제법 의젓하게 나를 반긴다. 나무는 사람보다 정직하다. 죽은 가지를 솎아주고, 지난 가을 솔잎의 갈비가 엉킨 곳을 털어내며 바람 길을 열어준다. 솔잎이 뭉쳐 있는 곳엔 햇볕 길을 위해 생가지를 솎아내야 한다. 인간세상에서는 그렇게 어렵다는 반송들의 구조조정이다. 녹색의 비명을 지르며 희생을 감수한다.

이제는 수형을 다듬기 위해 새순을 고른다. 지난 해 새로 난 네댓 개의 순들 중에서 우뚝한 대장 순을 찾아 자른다. 나머지 순들에게 영양분이 고루 갈 것이다. 인위적으로 둥그런 수형으로 키우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 탓이다. 또 한 해를 이렇게 나무에 매달리며 녹색의 날숨과 들숨 속에 파묻혀 상상의 생태계를 꿈꾸는 것은 오로지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일 것이다.

자연은 이렇게 의연한데 사람들은 못난 대통령이 저지른 국정농단에 대한 자괴감을 광화문 광장의 촛불행진으로 표출하며 지난 겨울을 견뎠다. 대통령이 나라를 사유화하는 분탕질에 자존심이 상한 시민들이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믿는 씻김굿의 제의에 동참하기 위해 다시 광장에 나섰다. 넉 달 동안 주말마다 만난 그들의 얼굴이 마냥 평화롭고 곱기도 했다. 국회청문회에서 거짓 증언을 일삼던 이른바 권력 주변에 기생하던 그들의 뻔뻔한 민낯에 우리는 분노보다 더 깊은 인간에 대한 연민에 젖기도 했다. 그리고 정말 우리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100년 넘는 명문대학의 승마 특기생 부정입학 과정과 대학총장의 영혼 없는 처신에 지성인의 권위가 몰락하는 과정을 씁쓸하게 지켜볼 뿐이다. 그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랜 동안 밤을 지새워야 할지 모를 일이다. 오히려 지난 봄여름 내내 대학의 가치를 힘들게 부르짖던 이름 모를 그 이대생들의 정직한 데모에 이제라도 박수를 보내야 한다. 당신들의 의로운 ‘소리 없는 함성’이 무능하고 부패한 대통령의 파면까지 이르게 했으니 말이다. 항상 처음은 미미하지만 그 결과는 창대할 수 있다. 그리고 젊음은 그렇게 맑고 건강해서 부럽다. 그리고 국정농단을 꿋꿋하게 한 걸음 더 깊게 보도한 언론인 앵커와 그 기자들의 고독한 몸부림이 더욱 아름답고 고맙다.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의 균형추가 우리 곁에 있음에 안심한다.

박근혜 대통령 파면을 선고하는 헌법재판소 뒤뜰의 600년 넘는 백송이 유별난 봄을 지켜보고 있다. 50년 넘게 떠돌던 쿠데타 대통령 아버지와 그 딸의 희한한 유령과 이제야 결별한다. 박정희 군사문화의 악령에 희생되었던 반짝이던 대학생은 이제 칠순을 앞둔 은발이 되었다. 새롭게 떨쳐나서야 한다. 항상 그러했듯이 가 보지 않은 길을 민주공화국의 주인인 우리가 가야 한다. 한 줌도 안 되는 못난 권력의 껍질들은 부끄러워하게 내버려 두자. 우리 손자들은 이런 세상을 경험하지 않도록 어깨 걸고 함께 격려하며, 대장정의 길에 한 발짝 내딛을 일이다.

조상호 나남출판ㆍ나남수목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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