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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룰라의 좌절과 법조 개혁

입력
2018.02.08 20: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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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브라질 노동자당원들 앞에서 연설 중 고개를 숙인 룰라 전 대통령 . 상파울루 AP 연합뉴스
지난 달 브라질 노동자당원들 앞에서 연설 중 고개를 숙인 룰라 전 대통령 . 상파울루 AP 연합뉴스

법원의 두 번째 판단이 궁금했다.

재임 시절 대형 건설사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16년 기소됐다가 지난해 1심에서 징역 9년 6개월을 선고받은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 얘기다. 1심에서는 유죄였지만, 2심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 궁금했다. 올해 10월로 예정된 브라질 대선에 출마한 그는 최근까지 모든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선두였기 때문이다. 후보 등록 마감인 올해 8월 전에 무죄를 입증하지 못해 대선 출마가 좌절된다면 엄청난 정치적 후폭풍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브라질 법원은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지난달 24일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시 연방법원(2심)은 재판부 전원 일치로 룰라 전 대통령에게 오히려 1심보다 무거운 징역 12년 1개월을 선고했다. 레오나르도 파울렌 판사는 “브라질에서는 힘이 있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정치적 고려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룰라 전 대통령이 즉시 대법원에 상고하고, 정권 탈환을 꿈꾸던 브라질 노동자당(PT)은 “정치적 판결이다. 대선 후보를 바꾸지 않겠다”고 반발했지만, 행차 뒤 나팔 부는 격이다. 현지 언론들은 이미 대선 후보군에서 룰라 전 대통령을 내려놓고 있다.

룰라 전 대통령이 누구인가. 그는 재임 중이던 2005년 측근들이 입법을 위해 야당 의원들을 표로 매수하는 최악의 정치스캔들이 발생했을 때에도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처럼 ‘아무리 비판 받아도 타격받지 않는 인물’로까지 불렸고 퇴임할 때 지지율은 80%를 넘었다. 하지만 그도 4년 전 브라질 검찰이 시작한 ‘세차 작전’이라는 권력형 비리 수사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국민 영웅의 마지막 도전을 사실상 좌절시킨, 브라질 검찰과 법원의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

브라질 변호사인 조희문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설명을 들어봤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브라질 법조계는 스스로 적폐를 청산하면서 국민들 신뢰를 얻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조 교수는 브라질에서 군사독재(1964~1984년)가 종식된 이후 ‘1988년 헌법(민주헌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군사정권의 수족 노릇을 했던 쓰라린 경험을 반성하면서 브라질 검찰은 쇄신을 자청했다. 형사 사건의 수사권을 포기하는 대신 검찰이 3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도록, 헌법상 기관 독립성을 보장받았다. 개별 검사의 수사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검사가 수사를 배당 받으면 검찰총장이 수사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했고, 총장이 검사 개인 동의 없이 인사를 할 수 없도록 인사권도 제한했다. 검찰뿐 아니라 사법부의 독립성도 1988년 이후 크게 확대됐다고 조 교수는 설명한다. 브라질에서 검찰, 경찰, 법원은 천주교와 함께 국민 신뢰도가 가장 높은 기관에 속한다.

역사와 전통이 우리와 다른 브라질의 법조개혁 방식을 도식적으로 준거로 삼으라는 당위론은 아니다. 검찰과 법원을 출입한 경험이 없어 법조계의 생리와 조직 논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평범한 시민의 눈높이로 판단해도 우리 법조계가 시대에 걸맞은 수준인지는 의아하기만 하다. 불리할 때는 납작 엎드려 있다가 틈만 보이면 권위를 내세우는 검찰이나, 판결의 염결성이 지상명제인 법원에서 판사동향을 감시하는 이른바 블랙리스트 의혹이 제기되는 일을 보면 이런 의심은 확신으로 바뀐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정부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의 ‘사법부 독립성 분야’의 순위는 2007년 35위에서 2016년 72위로 크게 떨어졌다고 한다. 검찰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야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정치권력이 아니라 시민만을 바라보는 검찰, 재판 독립성을 의심받지 않는 법원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브라질의 국민 영웅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이왕구 국제부 차장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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