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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지배 빙상계, 파벌싸움-성적 지상주의 '고질병'

입력
2018.02.28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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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규 연맹 부회장과 반대세력

선수들 갈등 ‘대리전 양상’ 표출

“전 부회장 눈 밖에 나면 끝” 소문

“성적만 내면 된다” 반대 의견 무시

갈등 유발한 연맹측은 책임 회피

팀워크 깨진 선수들만 비난 받아

김보름(왼쪽)과 노선영이 지난 21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팀추월 7~8위전을 마친 뒤 휴식을 취하고 있다. 강릉=연합뉴스
김보름(왼쪽)과 노선영이 지난 21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팀추월 7~8위전을 마친 뒤 휴식을 취하고 있다. 강릉=연합뉴스

한국 빙상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냈다. 한국의 17개 메달 가운데 빙상에서 13개를 수확했다. ‘효자 종목’ 쇼트트랙은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획득했고 스피드스케이팅에선 금메달 1개를 포함해 역대 올림픽 최다인 7개(은4ㆍ동2)를 쓸어 담았다.

하지만 연이은 깜짝 메달과 예상 밖 선전에도 한국 빙상은 큰 오점을 남겼다. 지난 19일 열린 여자 팀추월 준준결승 결과는 국민적 공분을 샀다. 앞선 두 선수 김보름(25)과 박지우(20)가 멀찌감치 처진 노선영(29)을 챙기지 않고 따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왕따 주행’에 국민들은 분노했다. 더구나 준결승 진출에 실패한 뒤 방송 인터뷰에서 노선영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태도를 보여 화를 더 키웠다.

매스스타트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김보름. 강릉=연합뉴스
매스스타트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김보름. 강릉=연합뉴스

김보름과 백철기 대표팀 감독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사전 약속에 따른 작전이었다고 했지만 노선영이 정면 반박하며 ‘진실공방’으로 번졌다. 올림픽을 마치고도 떠들썩하자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27일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여자 팀추월 사태에 대해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사태는 지나친 권한과 권력을 행사하는 전명규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과 이에 반발하는 세력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과거엔 한국체대와 비(非)한국체대의 파벌 싸움이었지만 지금은 같은 파벌에도 이해관계에 따라 세가 갈리는 모양새다. 빙상계에서는 전 부회장의 한마디면 훈련 방법, 입시 문제, 올림픽 메달, 실업팀 입단 등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고 있다. 전 부회장의 눈 밖에 난 선수는 그 순간 끝이라는 얘기도 있다.

빙상계 A관계자는 “한 쪽에 힘이 쏠려 있는 그들만의 리그”라며 “막강한 힘을 가진 한 명에 의해 모든 일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 힘의 균형을 분배해 자연스러운 경쟁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반대 쪽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음해 세력의 주장일 뿐이라고 여긴다”면서 “결국 성적을 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B관계자는 “빙상에서 파벌, 폭행, 도박 등 불미스러운 일이 계속 불거지니까 안 좋게 보는 눈도 많다”며 “연맹에서 선수를 더 신경 써주고, 지도자는 선수 개개인의 스타일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빙상의 권력 쏠림 현상은 늘 ‘파벌 논란’을 일으켰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 당시 한국체대와 비한국체대로 나뉘어 훈련했고, 2010년 밴쿠버올림픽 때는 국내 선발전에서 같은 파벌끼리 선수를 밀어주는 ‘짬짜미’ 사건이 세상에 알려져 큰 충격을 줬다. 2014년 소치올림픽은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가 3관왕에 오른 반면 한국 남자 쇼트트랙은 ‘노 골드’에 그치면서 또 주목을 받았다. 전 부회장은 성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14년 3월 자진 사퇴했지만 지난해 2월 평창올림픽 경기력 향상을 위해 다시 부회장으로 복귀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 부회장이 돌아오면서 한국 빙상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평창올림픽 전부터 분열 조짐이 있었다. 남녀 매스스타트의 이승훈(30)과 정재원(17), 김보름이 전 부회장의 주도로 한국체대 빙상장에서 따로 훈련한다는 ‘특혜 논란’이 일었다. 이들 외에는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훈련을 이어갔고, 소외감을 느끼는 선수도 있었다. 남자 매스스타트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이승훈은 이런 논란에 대해 “훈련하면서 다른 동료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했다”고 사과하기도 했다.

사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백철기(오른쪽) 감독과 김보름. 강릉=연합뉴스
사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백철기(오른쪽) 감독과 김보름. 강릉=연합뉴스

잠재된 갈등이 폭발한 계기는 빙상연맹의 어설픈 일 처리 때문이다. 노선영은 팀추월 대표팀의 일원으로 평창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지난달 개인 종목 출전권이 있어야 팀추월에도 나갈 수 있다는 국제빙상경기연맹(ISU)의 규정을 연맹이 숙지하지 못하면서 올림픽 출전이 무산되는 듯 했다. 개인 종목 1,500m 예비 후보 2위였던 노선영은 작심하고 “팀추월 훈련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등 대표팀의 훈련 방식을 폭로했다.

이후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노선영과 김보름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노선영이 러시아 선수의 도핑 문제로 1,500m 출전권을 얻어 다시 대표팀에 합류했지만 팀추월은 더 이상 팀이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 우려했던 일이 팀추월 준준결승에서 발생했다. 레이스를 마친 뒤 김보름은 당당했고, 노선영은 눈물을 훔쳤다.

축제의 장이 될 올림픽은 선수들이 눈시울을 붉히고, 사과하는 자리가 됐다.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것은 연맹의 잘못에서 비롯됐는데, 경기 중 보여지는 모습만으로 선수가 모든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연맹에서 쇼트트랙 심석희 코치 폭행 사건, 노선영 왕따 논란, 경기 당일 오전 선수단 숙소 방문 등 모든 일에 대한 진실을 아는 연맹 고위 인사들은 선수와 지도자 뒤로 숨었다. 전 부회장은 아예 언론과 접촉을 피하고 있다.

도종환 장관은 민주당 박경미 의원이 “문제가 발생했는데도 빙상연맹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선수들만 사과하고 있다”고 말하자 “지적한 문제가 이번 올림픽에 드러난 것이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A관계자는 “법보다 무서운 국민의 감정을 건드렸다”면서 “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숨바꼭질 하듯 뒤에 꼭꼭 숨었다”고 지적했다. 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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