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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어떤 나라를 원하는가

입력
2015.11.1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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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세끼, 1박2일과 같이 소소한 일상을 다루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인기다. 시청자들은 이 프로그램들을 보며 거창한 부(富)와 재물보다는 매일매일의 일상, 예컨대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 식사, 갑자기 떠난 친구들과의 짧은 여행, 허름하지만 따뜻한 잠자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문득문득 깨닫곤 한다. 역사상 그 어느 나라보다 빨리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성취했음에도, 오늘날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이 평범한 일상이 주는 즐거움으로부터 위로 받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삶이 과거보다 더 불안정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대한민국에서 근로자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삶의 모습은 소박하다. 성실하게 일하고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상당 기간 동안 같은 직장에서 일하고 적정한 임금을 받으며 사회보험에 가입해 노후를 준비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근로자들의 평범한 일상이고 헌법이 근로자들에게 보장한 최소한의 근로조건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근로자들이 이런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전체 임금 근로자 중 약 40%는 불안정한 고용에 노출되어 있고, 그 중 40% 가량은 퇴직급여 또는 공적연금에서 배제되어 있다. 이들은 당장의 생계를 위해 일하지만, 정규직보다 낮은 임금과 근속 기간으로 인해 노후를 준비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성실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퇴 이후에는 국가나 가족의 도움을 얻어야 하는 처지에 빠지곤 한다. 9ㆍ15 노사정 대타협은 이런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함으로써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우리 사회의 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 근로자의 고용 안정과 보호’를 시급한 과제로 지목했다.

지난 16일 노사정위원회는 기간제와 파견근로 등 비정규직 쟁점과 관련한 합의안 도출에 실패한 채, 노사정과 전문가 그룹 각각의 의견을 병기한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그 보고서에서 노사정과 전문가들의 의견은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을 논의한 것처럼 그리고 처음부터 합의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모였던 것처럼, 단 하나의 사항에 대해서도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한 채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비정규직 쟁점에 관한 노사정위원회의 후속 논의가 이런 모습으로 끝난 것은 취약계층 근로자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한 9ㆍ15 대타협의 합의 정신에 어긋난다.

백범 김구 선생께선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에서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고,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고 하며 대한민국이 올바른 정치 이념과 철학에 기초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다. 이것은 백범 개인이 아닌 임시정부와 광복 이후 수립된 정부의 비전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헌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하겠다고 떳떳하게 선언할 수 있었다.

이런 백범 선생의 뜻을 빌려 생각할 때, 우리는 비정규직 문제에 관한 해결 방안을 ‘작은 의견’으로 다뤄야 할까 아니면 ‘큰 의견’으로 다뤄야 할까? 헌법적 관점에서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주권자이고 그들 역시 적정임금과 인간다운 근로조건을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비춰볼 때, 이는 ‘큰 의견’으로 다뤄야 마땅하다.

따라서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한 구체적 방안은 시장적 이해관계나 경제적 합리성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며 우리의 국민성과 이념ㆍ철학에 기초하여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방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거나 노동시장에 관한 고정 관념에 집착하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비정규직들이 겪는 고단하고 불안정한 삶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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