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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은] 이병훈 PD "추리소설이 '대장금' '허준' 만들었다"

입력
2017.04.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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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삶을 바꾸는 순간이 있습니다. 유명 문화계 인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의 인생에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남긴 작품 또는 예술인을 소개합니다.

‘사극의 거장’ 이병훈 PD는 “43년간 1,1100편의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던 창작의 원천은 소설이었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사극의 거장’ 이병훈 PD는 “43년간 1,1100편의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던 창작의 원천은 소설이었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MBC에서 PD를 뽑는대.” 대학 졸업 뒤 언론사 시험을 보러 다니던 어느 날 친구가 취업 정보를 가져왔다. 1960~70년대만 해도 TV를 들여놓은 집이 드물었다. 그러니 PD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가수와 탤런트도 PD한테는 꼼짝 못한대.” “오~ 그래?” 귀가 솔깃했다.

언론사에 지원한 것도 어떤 꿈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공을 따지지 않는 몇 안 되는 직종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에서 1지망에 떨어지고 2지망 임학과에 들어갔는데 도통 적성에 맞지 않았다. 나중에 과수원을 하면 로맨틱하겠다는 순진한 생각에 지원한 임학과는 과실나무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전공이었다. 억지로 전공에 맞춰 수목원이나 산림청에서 일하기는 싫었다.

ROTC 소대장으로 군 복무하던 시절 밤에 철책선을 순찰하는 틈틈이 라디오를 듣곤 했다. ‘방송국에서 일하면 멋있겠구나’ 막연한 동경을 품은 적도 있지만, 그곳에서 내가 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만 덜컥 붙어버렸다. 1970년 10월 15일. MBC 입사일이 지금도 또렷하다.

처음엔 편성국에 배치됐다. 서울에서 방송한 필름을 챙겨서 지방으로 배송하는 게 주업무였다. 위성망으로 전파를 쏘는 지금과 달리 당시엔 필름을 각 지역 총국에서 받아 차례로 돌아가며 방송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크게 사고를 쳤다. 부산으로 가야 할 필름 하나를 빠뜨린 거다. 방송이 펑크 났다. 된통 야단을 맞았다. 점점 일에 흥미를 잃어갔다. 편성국에 들르는 드라마 PD들에게 “나 좀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왜 하필이면 드라마였을까. 예능프로그램은 눈부시고 재미도 있었지만 무대에서 펄시스터즈가 춤추고 노래하는 현란한 모습을 보니 왠지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교양프로그램은 대부분 스튜디오 좌담 형식이라 답답하고 지루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화려하면서도 아카데믹했다. 내 문학적 감수성과도 잘 맞을 것 같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주 심한 독서광이었다. 집에서 4~5㎞ 떨어진 초등학교 담장에 ‘길거리 책방’ 같은 곳이 있었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빌려다 봤다. 고등학교 때는 도서부장을 하면서 도서관의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었다. 특히 소설을 좋아했다.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내가 드라마에 끌린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병훈 PD가 MBC 드라마국장에서 퇴임한 뒤 연출한 드라마 ‘허준’(위부터)과 ‘상도’ ‘대장금’. 한류 붐을 이끈 ‘대장금’은 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유럽과 아프리카 등 전세계 90여 개국에서 방영됐다. MBC 제공
이병훈 PD가 MBC 드라마국장에서 퇴임한 뒤 연출한 드라마 ‘허준’(위부터)과 ‘상도’ ‘대장금’. 한류 붐을 이끈 ‘대장금’은 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유럽과 아프리카 등 전세계 90여 개국에서 방영됐다. MBC 제공
드라마 ‘서동요’(위부터)와 ‘이산’ ‘동이’. 영조를 성군으로 키운 숙빈 최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동이’는 감찰부 궁인으로 미제사건을 파헤치는 동이의 활약상을 추리소설처럼 그렸다. MBC 제공
드라마 ‘서동요’(위부터)와 ‘이산’ ‘동이’. 영조를 성군으로 키운 숙빈 최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동이’는 감찰부 궁인으로 미제사건을 파헤치는 동이의 활약상을 추리소설처럼 그렸다. MBC 제공

나의 독서 편력은 추리소설에까지 이어졌다. 나는 지금도 추리소설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을 뜯어말린다. 그 세계엔 출구가 없다. 왜? 정말 몸살 나게 재미있으니까!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서 시작해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 등 여러 추리작가들을 섭렵했다. 손바닥 크기 문고판 시리즈만 300권 넘게 읽은 것 같다. 끊임없이 책을 버렸는데도 아직 집엔 40년도 더 지난 추리소설 책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 내가 꼽는 최고의 작품은 엘러리 퀸의 ‘Y의 비극’이다. 1978년엔가 해외 출장을 가면서 이 책을 챙겼다. 16개국 방송 관계자들 앞에서 프로그램 발표를 하기로 돼 있었다. 행사 전날 밤 시간이나 때울 겸 책을 꺼냈다.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다. 숙소에서 출발해야 하는 시각은 아침 7시. 1시간 전에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30분만 눈을 붙여야지 했다가 그만 오전 10시에 일어나고 말았다. 행사에서 ‘개망신’을 당했다. 그래도 그 책을 읽던 순간만큼은 황홀하고 짜릿했다.

1974년 ‘113수사본부’라는 드라마로 ‘입봉’(영화나 방송프로그램 연출 데뷔)해 지금까지 43년간 드라마를 만들었다. 단언컨대 내 드라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소설이다. 재미있는 소설은 우연적 설정이 없고 리얼리티가 치밀하다. 무의식 중에 내 드라마의 구성과 전개 방식에도 투영됐다.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소설에서 영감과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특히 추리 코드는 내 드라마에 한결같이 흐르고 있다. 단서를 조각조각 던져놓고 맞춰가는 과정과 주인공의 영웅적 활약상이 추리소설의 탐정들과도 닮았다.

‘대장금’(2004)만 해도 그렇다. 장금이(이영애)는 수랏간 최고상궁 자리를 두고 펼쳐지는 궁중 암투 속에서 지혜롭게 여러 사건들을 해결해 나간다. 의녀가 된 뒤 왕이 앓는 병의 원인을 밝혀내고 치료약을 찾는 과정도 추리소설과 비슷하다. 훗날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동이’(2010)에선 무수리 동이(한효주)가 감찰부에서 범죄 수사를 하고 범인을 찾고 피해자의 사인을 밝혀내는 이야기가 20회 가량 그려진다.

‘상도’(2002) 1회 오프닝 장면은 코난 도일의 단편소설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셜록 홈스와 왓슨이 마차를 타고 기차역에 도착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갑자기 홈스가 왓슨에게 “자네 아내가 아프니 어서 집에 가보라”고 재촉한다. 왓슨이 “어떻게 알았냐”며 깜짝 놀란다. 왓슨이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는 모습, 아내의 부탁을 적어두는 메모지를 들추던 모습, 근처 병원에 눈길 주는 모습 등을 관찰해 얻은 결론이었다.

‘상도’는 송방 행수 다녕(김현주)과 청나라 상단이 거래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임상옥(이재룡)이 통역을 맡는다. 다녕은 인삼을 10냥에 팔 계획이라고 미리 일러둔다. 그런데 임상옥이 제 멋대로 흥정을 하더니 20냥에 거래를 해버린다. “저들이 거드름을 피우고 있지만, 바짓단에 해초가 묻어 있는 걸 보니 밤에 배를 타고 왔을 것이고, 그건 물건 확보가 다급하다는 뜻”이라며 “30냥에라도 사갈 테지만 바가지 씌우면 다음 기회가 없을 것이라 20냥에 팔았다”고 설명한다. 장사꾼으로서 임상옥의 천부적 자질과 배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방송이 나간 뒤 엄청나게 칭찬 받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보면 무의식 중에 표절의 함정에 빠지기 쉽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창의력과 상상력의 원천이다. 좋은 연출자가 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나는 작가와 드라마를 구상할 때 1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회차별로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다 써놓고 시작한다. 그래야 드라마 속 사건이 풍부하고 전개가 늘어지지 않는다. 이야기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집착은 소설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MBC 드라마국장을 지낸 뒤 ‘허준’(2000)으로 연출에 복귀해 16년간 8개 작품 461편을 내놨다. 입봉작부터 헤아리면 1,100편이 넘는다. 석 달 이상 쉬어본 적이 없다. 때때로 자기복제라고 욕도 많이 먹었다. 그래도 쫄딱 망한 작품은 없으니, 참 행복한 인생이다. 내가 사랑한 소설들에 마음의 빚을 졌다.

<드라마 ‘대장금’ ‘허준’ ‘상도’ ‘이산’ ‘마의’ 등을 연출한 ‘사극의 거장’ 이병훈 PD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추리소설 마니아인 이병훈 PD는 “좋은 대본에서 좋은 드라마가 나온다”고 말한다. 그는 대본 집필에 앞서 작가와 함께 이야기 구성 작업에만 6개월의 시간을 쏟아 붓는다. 고영권 기자youngkoh@hankookilbo.com
추리소설 마니아인 이병훈 PD는 “좋은 대본에서 좋은 드라마가 나온다”고 말한다. 그는 대본 집필에 앞서 작가와 함께 이야기 구성 작업에만 6개월의 시간을 쏟아 붓는다. 고영권 기자youngkoh@hankookilbo.com
마의에서 인의가 된 백광현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마의’(위), 이병훈 PD가 지난해 연출한 드라마 ‘옥중화’. MBC 제공
마의에서 인의가 된 백광현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마의’(위), 이병훈 PD가 지난해 연출한 드라마 ‘옥중화’. M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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