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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조조 부자와 인문학

입력
2016.10.1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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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소설 ‘삼국연의’의 주인공이다. 유비 관우 제갈량 조자룡 등과 공동 주인공이긴 하지만, 간웅(奸雄) 그러니까 간특한 영웅 이미지로 특화되어 있어 다른 주인공들보다 튀는 캐릭터임은 분명하다.

소설적 재미를 위해서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다. 정사 ‘삼국지’에 보면, 적어도 소년 시절 그에 대한 평가는 소설과 별다를 바 없다. 반면에 실제 역사에서 그는 쓸모가 덜한 구습과 관습을 타파하여 빼어난 성과를 거둔 통치가로 평가받곤 했다. “유재시거(唯才是擧)”란 그의 관리임용 기준이 대표적 예다. “재능만 있으면 다른 것 따지지 않고 등용한다”는 이 원칙은 도덕적, 전문적 역량을 고루 갖춘 이를 관리로 임용하던 전통을 일거에 깨뜨린 것이었다. 논자들이 그를 ‘창조적 파괴’를 선보인 탁월한 혁신가라고 평가하는 까닭이다.

이뿐만 아니었다. 그는, 역사가 자신을 기준으로 그 전과 후로 나뉘게 한 엄청난 일을 해내기도 했다. 고대 중국의 시가 얘기다. 중국 시의 역사가 그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가 중국 사상 최초로 시가에 개인의 서정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지금 보면 시에 개인적 서정을 담아냄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조조 이전엔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 시에 서정을 담는다면, 그건 오로지 집단의 서정이어야 했다. 자그마치 1,000년을 상회하는 세월 동안 늘 그러했다. 이런 전통을 조조가 깬 것이다. 그것도 아주 멋진 성과를 내면서 말이다.

‘삼국연의’에 유비나 손권의 시는 실리지 못했지만 그의 시가 떡하니 실리게 된 이유다. 게다가 1,800여 년 전에 지어진 그의 시는 지금 읽어도 울림이 그만이다. 그만큼 시대가 쌓여도 경쟁력 있게 써냈음이다. 그런데 뭔가 어색하다. 간웅이 썩 괜찮은 시를 썼다는 점이 말이다. 한두 편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조조는 30여 년 동안 전장을 누비면서도 틈틈이 시를 지었다. 또한 그는 많은 문인을 후원하여 중국 사상 최초로 문단이 조성되기에 이른다. 지극히 혼란했던 시절, 시로 대변되는 문학보다는 정치적 술수와 강력한 무력이 훨씬 쓸모 있던 때, 조조는 왜 문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을까.

이 물음은 그의 아들 조비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는 아버지 조조를 능가하면 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시인이었다. 중국 문학사에서 그는 특히 7언체 시가 정상궤도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단의 규모는 그의 시대에 들어 더욱 커졌고 문학의 수준도 한층 진보했다. 급기야 중국 사상 최초로 문학을 전문적으로 논한 글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가 편찬한 ‘전론(典論)’에 실린 ‘논문(論文)’이 그것이다.

‘문(文)을 논함’이란 제목의 이 글에서 그는 문학의 본질, 문체론 등을 체계적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논의의 대전제로 “아름다운 글은 나라 경영의 대업이고 썩지 아니할 훌륭한 사업(文章經國之大業, 不朽之盛事)”이란, 가히 혁명적 명제를 던졌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교화와 경세를 위해 존재하는 것, 따라서 아름다움보다는 실질을 숭상해야 한다는 관념이 앞선 1,000여 년간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는 이를 보란 듯이 깨고 아름다운 글이 경세와 교화의 핵심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 또한 ‘문’보다는 ‘무’가 훨씬 요긴했던 난세를 살았음에도, 부친처럼 문학을 중시하여 이를 천하 통치의 핵으로 삼았음이다. 이들 부자는 도대체 왜 그런 노선에 섰을까.

국가 경영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경영하는 일이다. 사람이 있어야 국가도 존재하기에 그렇다. 그런데 사람은 ‘정치적 동물’만은 아니다. 본성적으로 문학적이기도 하다. 정치적 이해관계나 이념적 시시비비만을 따지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감성이나 직관 등을 바탕으로, 이득이나 이념 따위를 초월하기도 하고 그들과 별 상관없이 지내기도 한다. 때론 감정에 매몰된 채 행동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에겐 문학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게 아니다. 삶과 세계를 문학적으로 바라보고 대화하며 향유할 수 없게 되면, 결국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 사회가 또 국가가 그렇게 불완전한 인간으로 채워진다면, 어떻게 안정될 수 있으며 또 평화롭게 지속될 수 있겠는가. 조조와 조비는 이미 1,700여 년 전에 이미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셈이다. 특히 난세일수록 인간 본성이 한층 직접적으로 발현된다는 점에서, 이들의 노선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귀결이었다. 단적으로, 그들은 ‘간웅’ 부자가 아니라 ‘문학 영웅’ 부자였던 것이다.

조 씨 부자에게 문학은 오늘날로 치면 인문학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선 고되게 쌓아 올린 민주적 질서와 인문적 제 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말의 권위가 처참하게 무너졌고 양식이 유린당했으며 역사가 집요하게 농락당했다. 난세의 징조가 분출되는 형국이다. 그러니 간웅이라도 좋다. 식견이 조조 부자 정도는 돼야 한 나라의 지도자라 자처할 수 있지 않겠는가.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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