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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진 칼럼/3월 29일] '인권지킴이 경찰' 허와 실

입력
2014.03.2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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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조그만 기사를 읽었다. '특수절도 혐의 피의자를 조사하면서 귀를 잡아당기고 정강이를 두세 번 걷어찬 경찰관(A경사)이 해임됐다. A경사는 피의자가 전날과 다른 진술을 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그랬다며 폭행을 시인했다. 경찰은 그의 처신이 적절하지 못했다고 보고 해임했다고 설명했다."

피의자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천국'이다. 특수절도 혐의로 붙잡힌 피의자를 취조하면서 귀를 잡아당기고 정강이를 찬 수사관이 인권유린을 이유로 목이 달아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경사는 '무궁화 이파리 4개' 계급으로 순경(2개) 경장(3개)을 거치고 간부가 되기 전 일선의 조장 급, 고참 폴리스다. 그런데도 그렇게 처리했으니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모든 피의자를 선량한 시민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수사기관의 금과옥조를 스스로의 목을 걸고 지키게 만드는 대한민국 경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앞뒤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조사를 마친 피의자는 바로 경찰서민원실로 달려가 '인권침해'를 호소했다. 기자들이 '경찰의 피의자 폭행'을 취재하기 시작했고 놀란 경찰수뇌부는 서둘러 '귀와 정강이 사태'를 공개했다. 그러면서 "이미 A경사를 징계위원회에 넘겼다"며 보도협조를 요청했다. 일주일쯤 뒤 경찰수뇌부는 "대표적인 피의자 인권침해 사례이므로 그를 해임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일벌백계, 읍참마속이라는 평가가 이어졌고, '인권지킴이 경찰'의 대표적 사례로 알려졌다.

경찰이 '일도 많고 탈도 많은 조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민과 국가체제가 민감하게 부딪히는 최전방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경찰은 정권보다 국민의 입장을 더 염두에 둬야 한다는 민의를 수용한 이후 1세대 봉사, 2세대 친절을 거쳐 3세대 인권을 아이콘으로 진화하고 있다. 봉사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민중의 지팡이'를 모토로 삼았고, 친절한 행태를 가꿔야 한다며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를 내걸었다. 이제 '인권지킴이'라는 말을 경찰의 앞뒤에 붙이고 있다.

경찰은 얼마 전부터 '인권경찰 실천 10계명'을 제정해 실천에 힘쓰고 있다. 첫 번째가 '경찰직무 수행 시 인권을 최우선으로', 마지막은 '인권의식 제고 노력'이다. 중간에 '규정과 절차 준수, 약자ㆍ소수자 배려, 고문가혹행위나 부적절한 언행 금지' 등이 있다. 지켜야 할 계명을 강조하여 실천하겠다니 고맙고 반가울 따름이다. 아쉬운 대목은 인권의 문제를 봉사와 친절과 여전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非)봉사나 불(不)친절에서 구해주는 것이 '인권지킴이'의 일이 아니다. 공직자로서 당연한 봉사나 친절에 소홀한 사례가 있다면 합당한 규정과 절차에 따라 처리하면 될 일이다. 굳이 '직무 수행 시 인권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곳이라면 국가인권위원회도 있고, 법원도 있다. 경찰은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원초적 의무를 갖고 있다.

경찰의 공권력은 이중성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범인 검거나 소요 진압 등은 신속하고 엄격히 처리하되, 수사ㆍ취조나 법 적용은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검거나 진압 등 공개적인(남들이 보는) 상황에서는 인권 운운하며 주저주저하고, 수사나 취조 등 비공개적인(남들이 보지 않는) 자리에서는 원초적 의무를 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상식이다. 경찰의 '인권지킴이' 구호가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귀-정강이-해임'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가 그렇다.

인권이란 봉사나 친절을 베푸는 일과는 별개다. 범죄자나 피해자에 대한 인권, 일반 시민에 대한 인권, 조직 내부의 인권 등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고 합당한 규정과 절차를 다듬어야 한다. '경찰이 인권을 잘 지키고 있다'는 인식은 과시하고 홍보하지 않더라도 입과 소문으로 저절로 퍼져나가 쌓이게 마련이다.

정병진 주필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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