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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저널리즘, 다시 기본이다

입력
2016.02.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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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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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이다. 경제지에 다니는 선배가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연말 성과급으로 1,000만원 이상을 받을 예정이라며 한턱 쏘는 자리였다. 선배의 재능은 비상했다. 대기업과 정부부처가 좋아할만한 아이템을 찾아내 기획기사를 쓰고 회사에 협찬금을 받게 해준 것이 성과급을 많이 받게 된 이유였다. 입사 후 성과급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어 그런 용어조차 생소한 내 입장에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드러내놓고 자랑할 일이 아닌데도 ‘현실론’을 거론하며 후배를 걱정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폭탄주가 여러 잔 오가자 선배는 애처롭게 후배를 쳐다보며 내뱉었다. “답답하게 살지 마라. 좋은 기사 쓴다고 알아주는 시대 지났다.” 추락하는 기자의 위상을 인식한 듯 선배는 자존심까지 내려 놓고 기능인의 삶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었다.

그 선배와의 술자리가 생각난 이유는 최근 본 영화 속 기자들의 모습 때문이다. 나도 기능인으로 변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자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시간 날 때마다 기자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봤다. 기자는 주로 영혼 없고 부패한 인물로 묘사됐다. 윤리의식도 실종됐고 겉과 속이 다른 캐릭터로 정형화 돼있었다. ‘내부자들’의 이강희 논설주간, ‘특종 : 량첸살인기’의 허 기자, ‘부당거래’의 김 기자가 그랬다. 동기부여는커녕 직업적 회의감만 더 깊어졌다. ‘나는 저들과 얼마나 다를까’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고 치부하기엔 개운치 않았다.

이쯤 되니 저널리즘의 의미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널리즘은 다양하게 정의되지만 보통 정보와 의견을 전달하는 언론활동으로 통한다. 사회 목탁으로서 품격 있고 공공성 높은 활동에 초점이 맞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모바일을 통한 뉴스소비가 급증하고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까지 겹쳐 자극적이고 표피적인 1회용 기사가 넘쳐나는 게 현실이다. 강력한 여론전파 수단으로 자리잡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즉각적 반응을 유도하는 편파적 논객들의 평론도 셀 수 없이 많아졌다. 기자는 점점 정보를 단순 유통하는 기능인으로 전락하고 기사에 철학이 개입할 여지는 줄어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부 과장이 섞였을지언정 취재 무용담을 거창하게 설명하는 선배들도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감춰진 진실을 캐기 위해 밤새워 거리를 헤매고 술집을 탐문했다는 선배, 부조리를 들춰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잠입취재를 했다는 선배,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호기롭게 힘센 사람들과 ‘맞짱’을 떴다는 선배, 이제 이런 이야기는 ‘술자리 토크’의 소재로도 안 나온다.

저널리스트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에 빠진 순간 이 영화를 통해 마음을 다잡았다. 2009년 개봉한 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State of Play)’의 마지막 장면엔 대학동창인 기자와 국회의원간 날 선 공방이 나온다. 유력 일간지 베테랑 사건기자인 칼 매커프리(러셀 크로우 분)는 촉망 받는 스타 국회의원이자 절친인 스티븐 콜린스(벤 애플렉)가 살인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간파하고 진실을 알리려고 한다. 물론 그가 속한 신문의 다음날 1면 톱기사를 통해서다. 위기에 몰린 의원은 “네 자존심 때문이라면 정말 웃긴 일”이라며 기사가 나가는 것을 막으려 하지만 기자는 단호했다. “왜, 이제 아무도 신문을 안 읽으니까? 며칠 시끄럽고 나면 다 잊혀지니까? 엉터리 기사가 요새 아무리 많아도 독자들은 아직 분별력은 있어. 다들 누군가 진실을 알려주길 바란다고.”

영화의 여운이 남아서 14년 전 수습기자 시절 선배들의 말을 듣고 취재수첩에 남긴 메모를 뒤져봤다. 눈에 들어온 문구는 ‘1시간만 지나면 잊혀질 기사보다는 1년 뒤에도 기억될 기사를 써라.’ 미디어환경이 급변해도 변하지 않아야 할 가치로 삼고 싶다.

강철원 사회부 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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