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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아들과 꼰대의 연대

입력
2018.01.25 13:1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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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1987’을 보고 왔다. 보수 정부 9년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고달픈 삶의 비명이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오는데 왜 청년들은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이 땅의 청년들은 불의에 저항하고, 행동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 압제에 맞서 독립을 외치던 청년들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고,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그런데 왜 지금 청년들은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한 것을 넘어 자신들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도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하는지 궁금했다.

북유럽 국가를 방문했을 때 북유럽 청년들의 고민은 무엇이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북유럽의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취업이 가장 큰 고민거리 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 밖의 답변이었다. 처음에는 고민이 없다고 이야기했다가, 잠시 후 고민이 있다고 대답했다. 북유럽 청년들의 고민은 세계평화와 환경오염이라는 것이었다. 취업도, 사랑도 아니고 세계평화와 환경오염이라니? 농담하자는 건가?

그리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북유럽 청년들은 타고날 때부터 이타적이고, 한국의 청년들은 타고날 때부터 이기적인가? 요즘 한국의 대학 생활은 살벌하다. 친구에게 노트를 빌려주는 일도 드물고, 취업 정보를 나누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야말로 각자도생이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고, 오로지 열심히 경력 쌓아서 취업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경쟁자이다.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어쩌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을 비판하고, 일깨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사회 문제에 적극적이었던, 86세대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희생하며 민주주의를 일구어냈다...”고 우쭐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청년들을 비겁한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청년들을 잘 훈련된 사회과학 논리로 교화시켜, 세상을 바꾸는 투쟁 전선에 나서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생각했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닐 것이다. 청년이 선거에 많이 참여하면 진보가 집권하기 훨씬 수월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촛불 혁명을 지켜보면서 86세대의 오만방자함은 일순간에 무너졌다. 사회변화와 정의에 무심한 듯 보였던 청년들의 모습은 어쩌면 그들의 탓이 아니었다.

“누가 이런 세상을 만들었습니까? 열심히 데모해서 만든 민주주의의 결과가 바로 이런 것입니까?” “당신들이 이렇게 만들어 놓고, 누구보고 책임지라는 것입니까?” “당신들이 책임지세요.” 청년들이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할 말을 잃었다.

우리 청년들이 이기적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청년들이 자기 자신 이외에 그 누구도 돌볼 수 없는 ‘잘난’ 86세대가 만든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위 명문대를 다니는 대학생들조차 장래의 불안함에 떨고 있는 세상에서, 청년들이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

청년들은 86세대와 다른 별종이 아니었다. 그들은 불의에 분노하고, 민중의 삶에 눈물 흘리며, 다양한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우리보다 더 인간적이고 관대한 심성과 피를 가진 존재였다. 청년과 86세대는 차이보다 공통점이 더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가 불평등하고, 불합리가 판치며, 패자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는 한국 사회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아들의 SNS의 배경이 87년 6월 민주주의를 외치며 시청 광장에 모인 백만 시민의 함성으로 가득 찬 것을 보았다. 86세대가 그들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의 연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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