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등록 : 2018.04.19 04:40
수정 : 2018.04.19 08:22

사라진 2만8,000여자, 정조와 다산은 무슨 얘길 했을까

[정민의 다산독본] <7> 사라진 책 ‘균암만필’

등록 : 2018.04.19 04:40
수정 : 2018.04.19 08:22

정조와 다산의 문답을 담은 5책본 사암선생연보. 붉은 글씨를 보면 균암만필을 지우고, 1인칭 '여(余)'를 3인칭 '공(公)'으로 수정한 흔적이 역력하다. 무엇을 감추고 싶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열수전서’ 총목록에 있는

1책64장 분량의 ‘균암만필’

‘사암선생연보’에만 일부 남아

누가 왜 감췄을까에 관심

유배 당시 제자 이정 거처에서

정조와의 대화 회상하며 기록

천주교 관련 내용 담아

후손들이 드러내지 않은 듯

‘열수전서 총목록’ 속의 ‘균암만필’

다산의 사라진 책 중 ‘균암만필(筠菴漫筆)’이 있다. 1934년 신조선사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는 가장본(家藏本) ‘열수전서(洌水全書)’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현손 정규영 친필의 총목록이 있었는데, 그 끝에 ‘균암만필’ 1책 64장과, ‘연보’ 2책 122장이 더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이중 ‘연보’ 2책은 그대로 있지만 ‘균암만필’은 간 곳이 없다.

1938년 최익한은 ‘여유당전서를 독함’에서 “‘균암만필’은 ‘목민심서’ 중에 인용한 ‘자균암만필(紫筠菴漫筆)’인데, 서명 및 그 장수(張數) 만은 ‘열수전서 총목록’ 중에 기재되었으니 어찌된 것입니까?”하고 당시 편집자에게 질문했다. ‘균암만필’이 어째서 목록에만 있고, ‘여유당전서’에서 빠졌느냐고 물은 것이다. 1책 64장이면 다산 가장본이 통상 1면에 10행 22자이니, 꽉 채워 썼을 때 2만8,160자의 적지 않은 분량이다. 최익한은 ‘목민심서’ 권 1 ‘부임 6조’ 중에 딱 한 단락이 인용된 ‘자균암만필’이 이 ‘균암만필’과 동일한 책일 것으로 보았다.

균암, 또는 자균암으로 불린 공간은 대체 어딜까?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그리고 왜 사라졌나? ‘여유당전서’ 편찬 당시 편집자들은 이미 이 책을 찾지 못했던 듯하다. 누군가 감추거나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인데 그 이유가 뭘까? 다 궁금하다.

‘다산연보’와 ‘사암선생연보’

다산의 연보는 현재 3종이 남았다. 먼저 나주 정씨 월헌공파 종회에 보관 중인 12장본 ‘다산연보’가 있다. 관력(官歷) 중심으로 간추린 것이다. 이 연보에 실린 이력은 다산이 세상을 뜨기 7년 전인 1830년 5월 기록이 마지막으로, 다산이 살아 있을 때 집안에서 만든 것이다. 성균관과 초계문신 시절 반시(泮試)와 과시(課試)의 등수, 채점관의 이름까지 상세히 적혀 있다. 본인 말고는 알기 힘든 내용이다. 하지만 다산 친필은 아니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는 앞서 최익한이 말한 2책 122장본과, 이와는 별도로 5책본 ‘사암선생연보’가 전한다. 2책본은 현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를 번역한 것이 송재소 선생의 ‘다산의 한평생’(창비ㆍ2014)이다. 5책본이 더 흥미롭다. 원래 가장본으로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된 김영호 선생 소장본이다. 2책본 ‘사암선생연보’를 간추리기 전 원본이다. 최익한은 2책본을 제자 이정이 작성한 초고를 현손 정규영이 정리한 것으로 보았다. 이정은 일반적으로 ‘이청’으로 읽으나, ‘정’이 맞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한 차례 쓰겠다. 5책본에도 첫 면에 ‘현손 규영(奎英) 편’이라고 적혀있다.

5액본 사암연보 첫 면. 오른쪽 아래 '현손 규영 편'이란 글자가 또렷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5책본 사암연보 중 남은 4책.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이 5책본 ‘사암선생연보’의 존재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다. 5책 중 제 2책이 결락되어 남은 것은 4책뿐이다. 분량이 적지 않다. 도처에 붉은 글씨로 수정 표시가 되었거나 두 줄을 그어 삭제를 지시한 내용이 보인다. 2책본 연보에 그 수정 표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2책본은 이 5책본을 간추려 축약한 것이다.

‘사암선생연보’에 남은 ‘균암만필’

흥미롭게도 5책본 연보의 제 1책 중 12개소에 ‘균암만필’의 내용이 인용되었다. 규장각본의 해당 면에는 예외 없이 인용 출처를 지우고, 1인칭 ‘여(余)’를 3인칭인 ‘공(公)’으로 수정했다. 제 1책 중 정조 승하 기사에만 ‘균암만필’ 인용이 딱 하나 남았다. 5책본 ‘사암선생연보’에 인용된 ‘균암만필’ 대목을 추출하여 입력해 원문 2,740자를 얻었다. 전체 예상 분량의 약 10분의 1 가량이 5책본 ‘사암선생연보’에 살아남은 셈이다.

사암연보 내용 가운데 일부. 오른쪽 상단에 '균암만필' 글자를 붉은 선으로 지웠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사암선생연보’ 제 1책은 탄생부터 39세 때인 1800년 정조 승하 시까지의 내용을 담았다. 제 3책은 48세 때인 1809년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없어진 제 2책은 1801년부터 1808년 사이를 다룬다. 다산이 유배 와서 다산 초당에 정착하기 직전까지다. 현재 남은 2책본으로 볼 때 정조 사후를 다룬 제 2책에는 ‘자균암만필’의 인용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암선생연보’의 12개소와 ‘목민심서’에 인용된 1개소를 합치면 모두 13개 단락이 살아남았다. 이 13개 단락의 내용은 대부분 정조와 다산 사이에 오간 대화거나, 규장각 시절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균암만필’은 다산이 정조 승하 후 어느 시점에선가 유배지의 균암 또는 자균암이라 불리는 공간에서, 정조와 함께 지낸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려 하나하나 호명해낸 회억록인 셈이다.

‘균암만필’, 언제 어디서 썼나?

5책본 ‘사암선생연보’의 존재를 처음 소개한 조성을 아주대 교수는 균암을 서울 명례방에 있던 죽란(竹欄)으로 보아, 1800년 6월 28일 정조 서거 이후 11월 18일 졸곡제 사이에 다산이 서울 집에서 지은 것으로 보았다. 필자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자균암은 어디인가? 자줏빛 대나무로 둘려있는 초암이다. 균암이란 명칭은 다산이 대둔사 승려 아암(兒菴) 혜장(惠藏)을 위해 써준 ‘장상인의 병풍에 제하다(題藏上人屏風)’란 글속에 한번 더 등장한다. 글 가운데 “맑은 창 소박한 책상에 독루향(篤耨香)을 사르고 소룡단(小龍團) 차를 끓여, 진미공(陳眉公)의 ‘복수전서(福壽全書)’를 읽으며, 싸래기 눈이 내린 균암(筠菴)에서 오각건(烏角巾)을 쓰고 금사연(金絲烟) 담뱃대를 물고서,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신주(水經新注)’를 읽는다”고 쓴 대목이 있다.

다산은 혜장과 1805년 여름에 처음 만났다. 혜장에게 써준 이 글은 적어도 1806년 이후에 쓴 글이고, ‘균암만필’을 쓴 시기도 같은 때라야 맞다. 다산은 강진 유배 18년간 거처를 네 차례 옮겼다. 처음엔 동문 매반가(賣飯家)에서 5년간 살았고, 1805년 겨울을 혜장의 배려로 고성사(高聲寺)에서 아들 정학연과 함께 났다. 세 번째 머문 곳이 제자 이정의 집이었다. 1806년 가을부터 귤동 초당으로 옮겨가는 1808년 봄까지 이곳에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이 유배시절 혜장 스님 덕에 한동안 머물렀던 전남 강진의 고성사. 제자 이정의 집으로 옮기면서 거처 주변에 대나무를 심은 뒤 '균암'이라 이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문화재청

균암, 또는 자균암이란 명칭은 묵재(默齋)란 이름으로도 불렸던 이정 집의 거처 이름이었을 것이다. 1807년 5월 1일에 거처 둘레에 대나무를 옮겨 심고 기뻐서 지은 ‘종죽(種竹)’ 시가 문집에 실려 있다. 대나무에 둘러싸인 집을 다산은 오래 꿈꿔 왔었다. ‘균암만필’은 1807년 5월 이후 1808년 봄 사이에 자균암에서, 자신에게 내린 정조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의 기억을 하나하나 되살려 써 내려간 기록으로 보인다.

제자 이정은 강진 유배 기간 내내 밀착해서 스승을 도왔던 최고의 제자였다. 하지만 다산의 해배 이후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정은 스승 다산에게서 등을 돌렸다. 다산의 모든 기록에서 이정에 관한 자취 또한 말소되었다. 강진 시절의 기록에서조차 이정 관련 내용만큼은 남은 것이 거의 없다. 다산이 아끼는 제자에게 거의 예외 없이 써 준 증언첩(贈言帖)도 이정에게 준 것만 남아있지 않다.

기록의 편린

‘균암만필’의 내용은 어떤가? 한 단락만 소개한다. 36세 때인 1797년 봄이었다. 다산이 집에 있는데, 임금의 갑작스런 호출이 있었다. 서둘러 비궁(閟宮)으로 들자 임금이 말했다. “내가 내리는 음식을 오래 맛보지 못한 듯하여 오라고 했다. 이리 가까이 와서 먹거라.” 정조는 그저 다산이 불쑥 보고 싶었던 것이다.

상에 토란이 올랐던지, 다산이 음식 먹는 것을 보던 임금이 물었다. “토란(우ㆍ芋)에 별명이 있느냐?” “준치(蹲鴟)입니다.” “속명은 뭐라 하지?” “토련(土蓮)이라 합니다.” “두보의 시에 ‘동산에서 우율(芋栗) 주우니 가난하지만은 않네(園收芋栗未全貧)’라고 했는데 어째서 ‘우(芋)와 율(栗)을 나란히 말했을까?” “우율이 아니라 서율(芧栗)입니다. 작은 밤 또는 도토리란 뜻이옵니다.” “그렇구나. 잘 알았다.”

임금이 다시 물었다. “‘사기’ ‘원앙전(袁盎傳)’에 ‘눈으로 전송한다(目送之)’고 한 구절을 혹 ‘직접 전송한다(自送之)’고도 하는데 ‘혼자서 웃는다(自笑之)’는 말의 잘못이 아닐까?” “아닙니다. 자송(自送)이라 한 것은 한나라 경제(景帝)가 몸소 일어나서 전송했다는 의미입니다.” “네 말이 옳겠다.”

어느 옆구리를 찔러도 기다렸다는 듯이 답이 술술 나왔다. 임금과 신하는 한가한 날의 오후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평소의 궁금증을 이렇게 다 풀었다. 9할이나 없어진 ‘균암만필’의 나머지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서학, 즉 천주교 관련 내용과 이로 인한 조정의 논의에 대한 설명도 상당 부분을 차지했을 듯하다. 후손들이 굳이 감추고 세상에 내놓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었을 것으로 굳이 짐작해 본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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