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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서별관회의’는 악(惡)인가

입력
2016.07.1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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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 관치 비난 받는 서별관회의

무자비한 시장주의 견제 장치로 필요

관치 자체보다 ‘관치 실패’를 따져야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은 대우조선에 대한 산은의 회생지원이 청와대 서별관회의를 통한‘관치(官治)’의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두 가지 관점에서 매우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서별관회의의 공식적 성격은 어디까지나 채권단이 대우조선의 회생계획을 추진함에 있어 감안해야 할 공공적 측면을 논의하기 위한 ‘채권단과 정부의 조용한 협의’ 정도로 해 두는 게 좋다. 안 그래도 조선 경쟁국인 일본 등이 대우조선 지원을 사실상 정부 보조금이라며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위반으로 제소하려고 움직이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산은 회장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맡았던 사람으로서 홍 전 회장은 개인적 면피에 급급해 할 말, 안 할 말조차 가리지 못했다.

그가 드러낸 두 번째 어리석음은 말을 가리지 못한 것보다 어찌 보면 더 심각하다. 그는 서별관회의에 관해 “시장원리가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고, 산은은 들러리 역할만 했다”고 했다. 산은 회장으로서 아무 주장도 못하고 들러리만 섰다는 점을 스스로 고백한 것도 미욱해 보인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시장원리’에 대한 맹목적 신봉이다.

사실 대우조선 실패가 부각되면서 시장 신봉자들의 목소리가 새삼 높아지고 있다. 그들은 ‘시장원리에 따라 대우조선을 진작 정리했다면 4조5,000억 원이라는 헛돈은 쓰지 않았을 것’이라며 정부를 성토한다. 홍 전 회장의 어설픈 자기변명도 ‘나는 시장원리를 생각했으나 정부에게 차단 당했다’는 식이어서 결국 시장원리에 따른 처리가 최선이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과연 시장은 언제나 최선일까.

시장은 언제나 최대의 효율과 이익을 위해 작동한다. 간명한 원리지만, 이 원리대로 굴러가는 세상은 참혹할 수도 있다. 마이클 더글러스가 주연한 영화 <월스트리트(1987)>는 그런 세상의 모습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경영난에 빠진 항공사 ‘블루스타’는 한 때 노동자들의 미래와 지역 공동체의 번영을 기약했던 삶의 터전이었다. 하지만 위기를 틈 타 블루스타의 경영권을 거머쥔 월스트리트의 투기꾼들은 회사를 회생시키기 보다 투자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고 회사 자산을 쪼개 마구 팔아 치운다. 순식간에 블루스타는 폐허로 변한다. 정비공장은 앙상한 잔해만 남고, 노동자들은 갈 곳을 잃고 스산한 거리를 떠돌 뿐이다.

대우조선을 시장원리에 따라 일찍 정리했다면 4조5,000억 원의 ‘헛돈’은 아예 쓰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월스트리트의 투기꾼이 대주주였다면 자산을 내다 팔고 노동자를 대량 해고해 순식간에 ‘알짜배기’ 회사로 탈바꿈시켰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부와의 협의 끝에 산은을 비롯한 채권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보라서가 아니다. 조선 1등국에 대한 미련, 경기 호전에 대한 기대, 노동자 대량 실직을 피해보려는 안간힘 같은 요소가 작용해 4조5,000억 원이라는 ‘기회비용’을 치르기로 결정한 셈이다.

시장이 아무리 효율적이어도 정부는 공익을 위해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할 때가 있다. 19세기 말 이후 완강하게 구축된 미국 독점자본주의의 폐해에 맞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반트러스트법(Antitrust Laws)을 휘둘렀던 것처럼, 이제 모든 정부에겐 시장에 의해 공익이 지나치게 훼손되지 않도록 개입할 책임이 커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기능적 면에서, 서별관회의나 관치는 단순히 악(惡)으로만 매도할 수 없는 나름의 정당성이 있다.

대우조선 사태에서 정작 따져야 할 초점은 관치나 서별관회의 자체가 아니라, 지원에 대한 공적 결정과정 이후의 부실경영과 감독 실패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격언처럼, 대우조선 실패의 원인은 자금지원 이후의 낙하산 인사와 경영 비리, 산은의 관리감독 부실에 있다. 국회에서 서별관회의에 대한 정치적 공방이 뜨겁지만, 그 사이에 정작 디테일 속에 숨은 ‘악마’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냉정하게 접근하기 바란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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