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으로 함께 못 온 두 동생에
"나 살아 있다" 떨리는 영상편지
동생들 "생각날 때 꺼내 보고 싶다"
80대 형님, 함께살던 초가집 그려 줘
첫날 어색함 벗고 웃음 얘기꽃
이별의 시간 다가오자 절박감
"다시 만나자" 애달픈 기약만
“나 살아 있다. 잘 살고 있고 통일이 되면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이산가족 상봉 이틀째인 21일 북측의 남철순(82) 할머니는 난생 처음 카메라 앞에 서서 떨리는 마음으로 ‘영상편지’를 남겼다. 65년 전 헤어졌던 두 동생 앞으로 보내는 메시지였다. 두 동생은 1985년 브라질로 이민을 가는 통에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 함께 하지 못했다. 언니를 만나러 온 남측의 여동생 순옥(80)씨는 “다 같이 왔어야 하는데 갑자기 연락이 오고 너무 멀어서 못 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자 남 할머니는 “멀리 살고 있는 두 동생에게도 내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며 간곡하게 취재진에 촬영을 요청해 영상편지가 만들어졌다. 생전 자신의 육성이 담긴 영상을 통해서라도 동생들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했다. 4남매 중 맏딸이었던 남 할머니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학교에 간다고 나갔다가 의용군에게 잡혀가는 바람에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이산가족 상봉이 이틀째로 접어들면서 남북한 가족들은 전날의 벅차올랐던 감정을 추스르고 한결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오전에는 남측 가족이 머물고 있는 금강산호텔로 북측 가족이 찾아와 만나는 개별상봉이 진행됐고, 이후 공동중식과 단체상봉 순으로 재회가 이어졌다. 취재진이 배석하지 않고 비공개로 진행된 개별상봉에서 가족들은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얘기하며 60여년간 쌓아놓은 회포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갑작스런 재회에 어색했던 분위기도 잠시, 각 방마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세월에 가로막혔던 마음의 거리도 허물어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남북 가족들 사이에선 1분 1초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절박감이 묻어났다. 서로 노래를 불러주거나 그림을 그려주는 등 기약 없는 이별에 대비하기 위한 일종의 ‘마지막 선물’도 주고 받았다.
두 살 때 헤어진 딸과 여동생을 만난 북측 최고령자 리흥종(88) 할아버지는 가족들과의 갑작스러운 재회에 충격을 받았는지 전날 환영만찬에서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쓰러졌지만 이날 상봉일정에는 모두 참석했다. 특히 리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돌아가서도 기억하고 싶다는 딸 이정숙(68)씨의 요청에 즉석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 애창곡이었던‘애수의 소야곡’과 ‘꿈꾸는 백마강’을 직접 불러줬다.
한국전쟁 당시 의용군에 끌려가면서 동생들과 헤어졌다는 북측의 리한식 할아버지(88)는 “형님 생각날 때 마다 꺼내보고 싶다”는 동생들의 요청에 65년 전 함께 살았던 고향 경북 예천의 초가집을 연필로 한 획 한 획 정성을 담아 그려주기도 했다.
60여년을 기다린 세월에 비해 2시간씩 감질나게 이어지는 ‘징검다리 상봉’에 대한 아쉬움도 터져 나왔다. 북측의 외삼촌 도흥규(85)씨를 만난 남측 조카 이민희(54)씨는 개별상봉 내내 “이따 또 볼 거다”라는 말로 외삼촌을 달래는 데 진땀을 뺐다. 외삼촌은 전날 첫 단체상봉이 만남의 전부인 줄로 알고 “2시간 만날 거면 상봉을 왜 하냐”고 테이블을 두드리며 화를 낼 정도로 짧은 상봉에 불만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도씨는 이날 마지막 단체상봉에서 “내일 한번만 더 보면 헤어진다”는 조카들의 말에 “나도 너희와 같이 가서 60년만에 서울 구경도 하고 싶다”며 어린아이처럼 울먹였다.
이날 상봉장 곳곳에선 “통일돼서 꼭 만나자”,“무조건 건강하게 100살까지 살자”는 약속과 다짐이 터져 나왔다. 이산가족들의 애달픈 감정을 대변하듯 이날 오후부터 금강산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한편, 이날은 건강 악화로 상봉 일정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일도 일어났다. 평소 앓고 있던 허리디스크가 심해져 금강산으로 출발할 당시에도 구급차로 이동했던 염진례(83) 할머니는 오후 들어 소화장애까지 겹치면서 호텔에서 의료진의 진료를 받아야 했다. 누이동생의 갑작스런 부재에 당황한 북측의 오빠 염진봉(84)씨에게 나머지 가족들은 “내일 아침 상봉 때는 꼭 모시고 오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금강산=공동취재단ㆍ강윤주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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