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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D-10] 한국육상 크게 세울 내 이름은 박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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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D-10] 한국육상 크게 세울 내 이름은 박태건

입력
2018.08.08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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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200m 20초40 기록 

 장재근의 33년 묵은 한국신 깨 

 400m서 주 종목 바꾸고 쌩쌩 

 박봉고 이름, 놀림에 상처받고 

 레이스 중 잘못 불려 개명 결심 

남자 육상 국가대표 박태건이 지난 3일 진천선수촌 제1육상장 트랙에서 스타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 6월 전국육상선수권에서 33년 만에 200m 한국신기록을 세운 그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또 한 번의 기록 경신과 금메달을 노리고 있다. 진천=김희지 인턴기자
남자 육상 국가대표 박태건이 지난 3일 진천선수촌 제1육상장 트랙에서 스타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 6월 전국육상선수권에서 33년 만에 200m 한국신기록을 세운 그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또 한 번의 기록 경신과 금메달을 노리고 있다. 진천=김희지 인턴기자

“목표 달성을 위해 지금은 저축한다 생각하며 버팁니다.”

40도에 이르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지난 3일 진천선수촌 제1육상장. 박태건(27ㆍ강원도청)의 입술은 검붉은 딱지로 얼룩져 있었다. 부르텄다가 가라앉기를 여러 번 반복된 상처다. 일본 출신 사쿠마 가즈히코 코치의 고된 체력 훈련을 소화하느라 생긴 ‘훈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지친 기색은 없었다. 한국 육상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자부심, 보여줄 게 더 많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지난 6월 28일 정선에서 열린 전국육상경기선수권 남자 200m 결승에서 33년 묵은 한국 기록이 깨졌다. 박태건이 20초40에 결승선을 통과해 1985년 장재근(56) 화성시청 감독의 기록(20초41)을 0.01초 앞당겼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려 트랙이 젖은 데다 대회 한 달 전 당한 아킬레스건 부상을 이겨내고 만든 값진 성과였다.

박태건은 18일 개막하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또 한 번의 한국신기록 경신과 금메달에 도전한다. 한국 단거리 육상이 아시안게임 정상에 오른 건 장재근 감독의 1986년 서울 대회 200m 금메달이 마지막이었다. 박태건은 “200m에서 새로운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시상대에서 애국가를 듣는 상상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말했다.

한국신기록을 수립한 뒤 엄지를 들며 활짝 웃고 있는 박태건. 대한육상연맹 제공
한국신기록을 수립한 뒤 엄지를 들며 활짝 웃고 있는 박태건. 대한육상연맹 제공

박태건의 원래 이름은 박봉고였다. 딸 셋을 낳은 뒤 네 번째로 얻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봉황 봉(鳳)’, ‘높을 고(高)’란 이름을 지어줬다. 그의 원래 주 종목은 200m가 아닌 400m였는데 한국 육상의 미래를 책임질 기대주로 주목 받으며 ‘박봉고’란 이름으로 유명세도 탔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때는 1,600m 계주의 2번 주자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이름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다. 차 이름을 빗대 ‘박봉고 말고 박페라리라고 지었으면 더 잘 달렸을 것’이라는 댓글에 상처받은 적도 있다. ‘봉구’라고 잘 못 불리는 경우도 많았다. 지난 해 6월 코리아오픈 200m에서 박태건이 1위로 치고 나가자 장내 아나운서는 “박봉구가 현재 1위입니다”고 이름을 틀리게 외쳤다. 찰나에 순위가 갈리는 레이스 도중 아나운서의 실수가 또렷하게 들릴 만큼 신경이 쓰였다. 박태건은 개명을 결심했다. 그는 “지금 이름을 못 바꾸면 평생 ‘봉고’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학창시절부터 개명하고 싶다고 할 때마다 반대하던 아버지도 허락했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외야수 손아섭(개명 전 손광민)의 새 이름을 지어줬다는 작명소를 수소문해 지난 해 11월 ‘클 태(泰)’, ‘세울 건(建)’이란 이름을 받았다.

한국신기록을 수립 당시 결승선을 통과하며 두 팔을 번쩍 들며 포효하는 박태건. 대한육상연맹 제공
한국신기록을 수립 당시 결승선을 통과하며 두 팔을 번쩍 들며 포효하는 박태건. 대한육상연맹 제공

육상계는 그가 2015년 말 주 종목을 200m로 바꾼 지 3년도 안 돼 한국신기록을 경신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종목을 변경하는 건 모험이었지만 새로운 이름의 뜻풀이대로 큰 업적을 세웠다. 그는 “2014년 아시안게임을 준비할 때 주변에서 ‘미쳤다’고 할 만큼 훈련에 몰입했다. 400m는 원 없이 뛰어봐서 미련도 후회도 없다”며 “200m 레이스는 150m, 180m까지 1위여도 아무 소용없다. 초반 스피드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에 승부가 갈리는 종목”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신기록을 세운 박태건(왼쪽)과 33년 전 원조 한국신기록 보유자였던 장재근(오른쪽) 화성시청 감독. 가운데는 현재 박태건을 지도하는 사쿠마 가즈히코 코치. 박태건 제공
한국신기록을 세운 박태건(왼쪽)과 33년 전 원조 한국신기록 보유자였던 장재근(오른쪽) 화성시청 감독. 가운데는 현재 박태건을 지도하는 사쿠마 가즈히코 코치. 박태건 제공

박태건이 보유한 한국신기록은 올 시즌 아시아 랭킹 5위권이다. 아시아 1위는 중국의 세전예(25ㆍ20초16)다. 박태건은 0.2초를 단축해 20초20이면 중국, 일본 선수들과 금메달 경쟁을 펼칠 수 있다고 본다. 인도네시아의 무더운 날씨가 변수지만 그는 “한국이 요즘 더 더워 예행연습을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라고 여유를 보였다.

장재근 감독은 박태건에게 “부디 만족하지 말고 더 큰 기록을 깨는 선수로 성장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박태건도 아시안게임을 넘어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인 최초 19초대 진입이라는 더 큰 포부를 품고 있다. 그는 “19초대면 세계적인 선수들과 메달도 다툴 수 있다. 한국 육상의 새 길을 개척하고 싶다”고 부르튼 입술을 깨물었다.

진천선수촌 제1육상장 트랙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선 박태건. 진천=김희지 인턴기자
진천선수촌 제1육상장 트랙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선 박태건. 진천=김희지 인턴기자

진천=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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