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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흰 벽에 흰 크레용으로 글쓰기

입력
2016.09.2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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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ㆍ단편 소설 가운데 단연 빼어나다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무척 수미일관한 작품이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라는 서두와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라는 말미는 요철(凹凸)처럼 완벽하게 맞물린다. 시인이면서 문학평론가인 김정란은 2001년에 발표한 김승옥론에서 모범적인 기행문처럼 마무리된 이 작품의 앞뒤 문장을 귀신처럼 파고든다.

주인공이 무진(霧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본 이정비에는 아무 색깔이 명기되지 않았던 반면, 그가 무진을 떠나는 장면에서 본 팻말은 ‘하얗고’ 거기에 적인 인사말은 ‘검다’. 이런 앞뒤 차이는 작가의 의도나 실수이기보다, 남성 작가의 무의식이 발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서울에서 내려온 주인공은 무진에서 세 명의 여자를 만난다. 어머니(모성), 하인숙(에로스), 자살한 술집 여자(광녀). 이들은 서울에 두고 온 아내(아마조네스)가 그런 것처럼, 그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다. 남성이 여성을 모성ㆍ 에로스ㆍ 광녀ㆍ 아마조네스로 손쉽게 상징화하는 것은, 이해 불가능한 타자를 자신의 이해 속에 포박하기 위해서다. 여성의 장소인 무진(안개 자욱한 나루터) 혹은 ‘하얀 팻말(여성)’ 위에, 남성이 선명한 검은 ‘글씨’를 새겨 넣은 것이 2,000년 동안의 문학이다.

저런 해석은 여성 문학평론가의 생물학적 한계를 드러낸 것일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소설은 도시 중산층 속물로 출세가 보장된 주인공이 안개 낀 어느 시골 소도시로 내려가 중학교 음악선생 하나를 농락하고 입맛을 다시며 상경하는 스토리 라인”이라고 평했던 남성 소설가 이제하의 말도 경청해 보자. 그는 ‘무진기행’에 나오는 유명한 일절 가운데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 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를 인용한 뒤, 이런 촌평을 달았다(이제하 선생님이 작년 6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글을 무단으로 빌려왔다. 용서를 구합니다).

“소설에 나오는 이 문장. 생선 썩는 냄새를 갈망하던 60년대 대중 독자들에게 이 문장은 감수성의 혁명으로 읽힐 법도 하지만 페미니즘이 대세처럼 진행되고 있는 지금 성폭행 범죄소설로도 읽힐 수가 있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여자를 농락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수컷들의 간교하고 구역질 나는 센티멘털리즘으로 읽힐 수도 있지 않겠는가.”

김정란은 남성 작가가 여성을 옳게 묘사하는 일을, 흰 크레용으로 흰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 어려운 임무라고 말한다. 남성 문학평론가 김형중 역시 2008년에 펴낸 자신의 문학 평론집에서 “여성성이란 최종심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이러저러한 담론들이 여성에게 강요한 자질”이라면서, 이상 장용학 최인훈 황석영 김성동 김훈은 물론 “신경숙을 필두로 여성성의 이상화에 편승했던 90년대의 많은 여성 작가들 또한 이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비판한다.

모든 작가들이 페미니즘에 입각한 작품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모든 남녀 작가에게는 자신만의 세계관이 주어져야 맞다. 다만 독자에겐 작가들의 젠더 감수성을 음미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때 ‘페미니즘 문학비평’은 축소(-)이며, ‘(일반적인) 문학비평’은 확대(+)라는 그럴듯한 헛소리를 물리쳐야 한다. (일반적인) 문학비평은 페미니즘 문학비평보다 더 편벽하고, 오히려 페미니즘 비평이 (일반적인) 문학비평보다 더 종합적이라는 게 진실이다. 아울러 물리칠 것은, 페미니스트를 향해 ‘페미니즘을 버리고 휴머니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광광 울어대는 반(反)휴머니즘적인 곡성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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