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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의 우충좌돌] 탈권위주의 다음에 필요한 것

입력
2017.09.1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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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소통’만으로 복잡한 갈등 못 풀어

때로는 효과적 관리능력이 더욱 요구돼

북핵 대응은 모든 가능성 열어 두어야

문재인대통령은 탈권위주의적 덕목 덕택에 높은 지지율을 누리고 있고, 이 점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정부의 지지자이지만, 나는 탈권위주의라는 빛에도 그림자가 있다고 생각하며, 감히 몇 가지 제안을 던지고 싶다.

우선, 대통령의 겸손한 ‘소통’ 방식은 그 자체로도 돋보이는 개인적 미덕이지만 무엇보다 박근혜의 ‘불통’의 반사효과 때문에 빛을 발한 면이 크다. 갈등이 복잡한 현재 사회에서 정치지도자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은 애초에 선함과 겸손함을 통한 ‘소통’은 아니었을 터이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소통의 가치가 크게 다가왔다. 그러나 아무리 선의를 가졌다 한들, 정치인은 복잡한 사회에서 보편적 선의에 근거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는 근본적으로 어렵다. ‘착한 소통’은 복잡한 사회의 갈등 앞에서 한계를 가진다.

또 냉정하게 보면, ‘소통’이 청와대에 의해 편리한 방식으로 선택적으로 이용되는 점도 없지 않다. 인사 문제 등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유리하고 편리한 방식으로만 소통하고, 불편한 문제에 대해서는 소통하지 않는다면, 소통의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이것은 꼭 청와대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현대 정치가 ‘착한 소통’에 근거하지 않는 면이 크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는, 탈권위주의를 추구하면서 다시 대통령의 권위에 과도하게 기댈 때, 또 다른 권위주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권위주의가 꼭 딱딱한 형태를 띠란 법은 없다. 권위주의가 민주주의의 장애물로 작용할 때는, 탈권위주의가 긴급하게 필요하고 또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나아가면, 이제까진 탈권위주의적 소통이 중요했지만, 이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복잡한 사회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이다. 정책적 권한을 각각의 부처에 분산하고 책임을 위임하는 효과적인 시스템도 필요하다. 소탈함과 겸손함 덕택에 얻은 인기와 지지율은 사회적 갈등이 들끓는 국면에서 오래 지속하기 힘들 듯하다. 물론 여기서도 구별이 필요할 것이다. ‘착한 소통’은 인권을 확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경찰은 그것을 위해 노력할 듯하다. 그리고 복지 분야에서도 약자들에게 혜택이 많이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회적 갈등들에서 ‘착한’ 소통은 한계에 부딪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는 정치적 능력과 설득력에 근거해 지지율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증세, 교육개혁, 일자리확대, 부동산, 방산비리 앞에서, 정부는 탈권위주의와는 다른 방향의 장기적 전략과 전술적 능력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북핵 리스크가 확대되고 있는 최근엔, 안보팀 내부의 자중지란과 전략의 부재가 정부의 능력에 의심을 품게 만든다. 전술핵 재배치가 해답이 될 수 없고 핵이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대통령의 말은 지도자의 막중한 신중함을 반영한다. 그러나 북의 도발 앞에서 대통령의 입에서 점점 더 강경한 발언이 나온다면, 그리고 핵잠수함 도입이나 재래식 무기의 엄청난 확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면, 그것도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비용도 많이 들지만, 핵의 위협을 피하게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북핵은 체제보장용’이라는 대통령의 발언도 물론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선의를 가졌을 터이지만, 북한이 실질적 핵보유국가로서 미국이 통제하지 못하는 동북아의 ‘게임 체인저’로 여겨지는 순간, 그것은 이미 그 수준을 넘었을 것이다. 아마도 한반도 ‘비핵화’나 ‘핵동결’은 이젠 불가능한 정책에 가깝고, 설혹 실현된다 한들 미군철수에 버금가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대화를 통한 ‘비핵화’에 근거했던 이제까지의 진보적 대북정책의 한 축이 무너졌다면, 이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여지를 열어놓는 길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대화의지 표명과 강경발언 사이에서 무력하게 갈팡질팡하기 쉽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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