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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칼럼] ‘힐링의 상업화’ 그 위험한 덫

입력
2015.06.1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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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한국사회에 회자되고 있는 인기어 중의 하나는 ‘힐링’이다. TV의 다양한 프로그램들, 서적들, 그리고 ‘힐링 전문가’들을 통해서‘힐링’이라는 개념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장소를 불문하고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힐링’이라는 개념이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되어 한국사회에 ‘힐링의 상업화’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종류의 ‘힐링 캠프’나 ‘힐링 투어리즘’이라는 관광상품도 등장하고 있으니, 한국은 참으로 ‘힐링 천국’이 되어 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이러한 ‘힐링의 상업화’ 는 보이지 않는 ‘위험한 덫’으로 우리를 유인하면서 정작 힐링이란 무엇이며, 힐링에서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은 무엇인가라는 중요한 물음들을 묻지 않게 한다.

모든 인간은 ‘온전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온전한 삶’이란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에 요청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고 조화를 이룬 삶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삶에서 ‘온전성’을 이루기 위한 조건들은 혼자서 노력하기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감정적, 관계적, 정치사회적, 직업적 또는 제도적 조건 등 다양한 요소들이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힐링’의 문자적 의미는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 사람의 ‘온전성’이 질병, 불평등한 관계, 사회적 편견, 불의한 정치체제, 기회의 박탈 또는 결함 있는 제도적 장치 등 다양한 요인들에 의하여 깨어질 때 그 ‘깨어진 온전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것이 바로 ‘힐링’이다. 따라서 진정한 힐링이란 다양한 요인들에 의한 ‘깨어짐’과 ‘불균형’이 극복되어 그 ‘온전성’이 회복되거나 성취되는 것을 의미한다.

‘힐링의 상업화’는 진정한 힐링을 위해서 우리가 들여다 보아야 할 핵심적 요소들을 보지 못하게 하면서 세 가지 위험한 문제점들을 양산한다. 첫째, 힐링의 개인화와 사적화(私的化)이다. ‘힐링의 상업화’속에서 힐링은 언제나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힐링’의 대상인 개별인들의 ‘온전성’을 깨어지게 만든 상처들이 사회구조의 병폐들이나 폭력적인 차별적 인식과 관계들로부터 야기된 경우 조차도 힐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메르스의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 세월호 유가족들 또는 보육원에서 언어적, 심리적, 육체적 폭력을 경험한 아이들의 ‘힐링’에 있어서, 그들을 사적인 한 개별인으로서만 전제할 때에 일시적이고 파편적인 힐링은 가능할 지 모르나 ‘통전적(holistic) 힐링’의 가능성은 차단된다. 국가적 차원의 책임적인 대처와 그에 따른 제도적 장치들의 변화가 동반되어야만 온전한 ‘힐링’의 문이 비로소 조금씩 열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별, 계층, 성적 지향, 육체적 장애 등에 근거한 차별들에 의하여 가정, 학교, 종교, 또는 직장에서 지속적으로 상처를 받아 온 사람들에 대한 힐링은 힐링 서적, 프로그램, 개별적 상담 또는 관광 등을 통해 그들의 기분이 일시적으로 나아진다고 해서 그 온전한 의미의 힐링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사회 도처에서 받는 편견들이나 제도적 차별에 의하여 받은 상처의 힐링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 변화는 물론 그들의 권리와 평등을 보장하는 정치사회적 제도들의 변화가 ‘통전적 힐링’의 중요한 필요조건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힐링의 탈정치화의 문제이다. 상업화된 ‘힐링’에서는 개별인들이 지닌 ‘상처들’이 사실상 사적ㆍ공적 영역에서의 복합적인 ‘권력 관계’와 언제나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다층적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과 해결방안을 통해서 가능한 힐링이 지극히 ‘탈정치화’ 되고 ‘탈역사화’ 된다. 다양한 ‘힐링 상품들’을 통해서 잠정적으로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물론 중요할 수 있지만, 그것은 종종 아편과도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다.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적 삶 속에서 자신이 받고 있는 상처가 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의 왜곡된 편견과 권력의 남용 또는 사회정치적인 제도들에 의하여 야기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여 결국 개인 자신만을 탓하며 기분만 나아지는 것을 추구하고 아무런 현실적인 변화를 모색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삶의 온전성이 깨어지게 된 ‘상처받은 나’는 점점 ‘탈정치화’ 되고 ‘탈역사화’되어 결국 ‘깨어짐’의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 ‘사적인 개인’으로만 남아있게 된다.

셋째, 힐링의 계층화의 문제이다. 한국사회에 대중화되어 확산되고 있는 ‘힐링의 상업화’를 통해서 사회적 저변층의 사람들은 점점 사회ㆍ문화ㆍ정치적 관심 밖에 놓여지게 되면서 더욱 주변화되기 쉽다. 매일 먹을 양식과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이 ‘힐링 관광’이나 ‘힐링 캠프’에 시간과 돈을 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힐링의 상업화는 사회적 저변층의 사람들이 마치 ‘힐링’을 받을 조건이나 자격조차 없는 이들이라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서 부모에게 ‘힐링 관광’을 시켜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자식만이 진정한 효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힐링의 상업화’속에서 한 개별인들의 ‘온전한 삶’에 필요조건들인 복지정책, 차별방지정책, 제도적 권리 보호정책 등 다양한 제도와 법률을 제정하고 실행하는 ‘국가’의 책임과 역할은 사라진다. 그래서 개별인으로서의 국민들의 ‘온전한 삶’ ‘행복한 삶’ 에 국가가 중대한 책임적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보지 못하게 한다. 한 국가에 속한 ‘국민’으로서 다양한 통제와 통치를 받고 있는 현대의 개별인들에게서 ‘온전한 힐링’은 국가가 올바르게 기능을 하지 못할 때에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통전적 힐링’이란 사적이고 개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공적이며 사회정치적인 것이다.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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