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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가로수는 권력이다

입력
2017.06.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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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기억하는 가로수는 신작로의 포플러나무와 초등학교 운동장 둘레에 심어진 플라타너스이다. 녹색에 대한 그리움의 원형이다. 수직으로 치솟는 포플러와 넉넉한 품을 내어 주는 플라타너스의 교차점 어딘가에 소년의 꿈이 있었을 것이다. 뙤약볕에 자라는 벼 들판을 가로지르며 곧게 뚫린 신작로에 열병식을 하는 포플러는 가난하고 힘든 농촌생활을 잠시 잊게 하는 녹색깃발이었다. 한여름 고단한 노동의 열기를 식히는 유일한 그늘이기도 했다. 지금 목가적 농촌 풍경으로 노래하는 가로수 그늘 밑은 그때 농부들의 서러움을 외면하는 사치일 수 있다. 하루 두세 번 대처로 나가는 버스가 비포장 길 신작로에 일으키는 먼지는 또 다른 뭉게구름을 만들었다. 그 포플러 가로수 길은 각박한 농촌을 탈출하는 지평선 너머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이정표이기도 했다.

포플러는 다만 푸르고 오직 곧게만 자란다. 다른 나무들처럼 수세(樹勢)를 자랑하며 주변 초목을 압박하지도 않고 술책도 부리지 않는다. 1924년 김교신은 〈포플러나무 예찬〉에서 가지가 줄기에 붙어 하늘로 치솟는 자신의 길을 가는 포플러의 기상을 호주의 유칼립투스를 떠올리며 신앙의 모습으로 읽었다. 또 30년이 지나면 백상(百想) 장기영은 ‘정정당당한 보도’를 기치로 〈한국일보〉를 창간한다. 고정관념의 족쇄를 끊고 하늘로만 치닫는 새롭고 젊은 포플러를 닮고 싶어 녹색의 사기(社旗)를 휘날렸지 싶다. 강호의 인재를 모으고 ‘대장 기자’로서의 헌신은 한국 저널리즘의 큰 획을 그은 녹색 돌풍이었다. 포플러 나무심기의 캠페인에 앞장서기도 했다. 젊은 날 사숙(私淑)한 백상이 창간한 신문에 그 포플러의 푸르름이 마음속에 아직도 자라고 있는지 나이 70이 다 되어 이 칼럼을 쓴다.

가로수는 권력이다. 권력자는 가로수의 수종을 독점한다. 박정희 시대에는 성과를 빨리 보여 주고 싶어 심은 속성수 이태리포플러와 현사시나무가 전국의 길을 덮는다. 가난한 시절 꽃이 쌀밥 같아 좋아했다는 이팝나무가 그의 생가 앞까지 가로수가 된다. 대를 이어 청와대에 입성한 딸도 이팝나무를 기념식수한다. 청계천을 되살린 서울시장도 비슷한 경험 때문인지 천변에 이팝나무 가로수 길을 만들었다. 관광객 유치라는 어설픈 명목으로 번지는 벚나무도 있지만 여유 있게 목백합, 산딸나무, 대왕참나무가 가로수의 세대교체를 하는 오늘이다.

조밀한 도시는 콘크리트 같은 탐욕이 항상 먼저이다. 녹색공간이었던 가로수는 상가 간판을 가리거나 고압전선의 방해물로 취급된다. 해마다 플라타너스의 몸통만 남기고 가지치기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자연스러운 열매 냄새가 불편하다고 은행나무를 베어 낸다. 자동차 우선의 좁은 인도를 넓힐 생각은 뒷전이다. 30년 전 톨스토이 생가를 찾아가던 가난한 러시아의 도로에 겹겹이 넓은 녹색 띠를 두른 가로수의 기억이 새롭다. 미국 보스턴 MIT 대학 앞 넓은 길의 대왕참나무 가로수 길은 숲길 같았다. 언제까지 땅 넓은 나라의 풍경일 뿐이라고 부러워해야 할까. 서울시장은 종로거리를 지하화하여 상가와 인도를 새로 만든다고 한다. 그때 가로수 구경도 못하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에는 무엇이 남겨질지 모를 일이다.

30년 전 한강을 따라 뚫린 100리 길 88올림픽도로에는 귀하다는 느티나무와 학자수(學者樹)인 회화나무가 가로수로 등장했다. 넓은 대로의 양쪽엔 태양을 한가슴 안고 가지치기의 학대도 받지 않는 원형 그대로의 우람한 녹색공간이 되었다. 공공재인 가로수에도 예의를 차려 나무를 심는 선각자를 가진 행복에 감사해야 한다. 차 막힌다고 짜증날 때마다 나는 무슨 탐욕을 찾아 이렇게 바쁜가를 되뇌어 보자. 눈을 들어 잠시 하늘을 보고, 잘 자란 이 나무들의 안부도 물을 일이다. 가로수의 세련된 권력을 기대해 본다.

조상호 나남출판ㆍ나남수목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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