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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기억이 치유를 만나다

입력
2017.07.1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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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김제 가족간첩단 사건’ 재심 선고 소식을 접하며 만감이 교차했다. 사건의 내용을 떠나 우선 ‘34년 만의 무죄확정’이라는 공판 결과는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이미 사망했다는 피해당사자들이 당시에 겪었을 고초가 뒤를 이어 눈에 밟혔다. 뉴스화면을 통해 환하게 웃는 가족들의 표정을 보면서는 온갖 억압 속에서 처절하게 버텨왔을 생의 무게가 가볍지 않게 느껴져 왔다. 그들이 실재 현실 속에서 얼마나 고통에 겨워했을지 가늠하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간첩단 사건’이라는 용어 또한 내게 무척 익숙하다. 또 다른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들이면서 재심을 통해 하나같이 무죄판결을 받아낸 분들과 더불어 지난해 사진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기억과의 대면을 통한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함께 해온 인연 때문이다. 이분들에게 기억은 고통과 상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들의 내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나 다름이 없었다. 단지 뉴스화면을 통해 본 ‘김제가족간첩단 사건’ 피해자 가족들이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오랜 기간 내재화했을 상처가 눈에 들어온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기억 속에는 다양한 감정이 담겨있다. 누구나 어느 시기 어떤 연유에 의해 기쁘거나 행복한, 그리고 슬프거나 우울해 아프게 새겨질 만한 순간을 경험하며 산다. 그 순간이 지나면 발생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떠올리기 좋은 것과 싫은 것으로 양분돼 자연스럽게 기억 속에 내재화한다. 시간의 흐름이 길어지면 종종 좋거나 싫은 것 자체가 무뎌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개인의 의지로 맞설 수 없는 강압적 상황에 대한 기억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자존감에 심각한 훼손이 생겼을 경우는 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이들의 곁을 지키며 그들이 스스로의 기억과 마주하면서 자기회복의 시간을 가지는 걸 지속적으로 지켜보았다. 엄혹했던 70ㆍ80년대 군사정권 시절 국가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어 인간으로서의 지위와 존엄성을 박탈당했던 일곱 명의 피해자들과의 인연은 그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개인의 자유와 생명의 가치는 폭력적 고문과 오랜 수형생활로 철저히 유린됐고, 출소 후에도 끝없이 이어진 감시와 통제 속에서 지치고 쓰러지기를 반복했던 그들이었다. 지난해 우리는 6개월에 걸쳐 고통스런 기억과 대면하면서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는 프로그램을 함께 했다. 자기를 억제하고 침탈했던 기억과 마주하면서, 그리고 삶을 꽃피우고 꿈을 품었던 원존재로서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치유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조금씩 생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된 것은 물론 살아가야 할 힘을 다시 얻는 과정이었다.

올 들어서도 그분들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에 비해 참가자들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날이 되면 모두가 여러 음식들을 나누면서 한참 동안 수다(?)를 떠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기도 한다.

1974년 울릉도 간첩단 사건, 1979년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 1980년 보성 간첩단 사건, 1982년과 86년의 재일교포 간첩사건의 직ㆍ간접 피해자들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던 여섯 명이 한데 모여 고통의 기억들을 뒤로한 채 어린애 마냥 즐거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뭉클한 감동이 가슴을 데운다. 올해에도 이어질 그들과의 시간이 기대된다. 사진을 찍기 위해 고통스런 기억과 마주한 게 아니라 그 기억과 맞서 원래 온전히 아름다웠던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카메라를 들겠다는 이사영, 최양준, 김태룡, 김순자, 이옥분, 정숙항씨 등 여섯 분의 조작 피해자들에게 응원과 지지의 박수를 보낸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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