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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20년 빛과 그림자] “분배와 복지로 위기 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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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20년 빛과 그림자] “분배와 복지로 위기 대비해야”

입력
2017.11.06 04:00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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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비정규직, 대-중소기업 등

외환위기 후 양극화 심해져

인공지능 등이 노동 대체하면

상황 더 심각해질 수도

내수ㆍ중소기업ㆍ서비스업 키우고

분배ㆍ복지 정책으로 보완해

불균형 경제 구조 개선해야

김용덕 전 금감위원장은 지난달 24일 한국일보와 가진 '외환위기 20주년' 회고 인터뷰에서 "국제금융시장은 여전히 적과 동지가 불분명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면 곧장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살벌한 전장"이라고 강조했다. 류효진 기자
김용덕 전 금감위원장은 지난달 24일 한국일보와 가진 '외환위기 20주년' 회고 인터뷰에서 "국제금융시장은 여전히 적과 동지가 불분명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면 곧장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살벌한 전장"이라고 강조했다. 류효진 기자

김용덕 전 금융감독위원장(신임 손해보험협회장)에게 외환위기는 인생의 상처인 동시에 훈장과도 같은 기억이다. 그는 정부 내 최일선에서 외환위기로 무너져 내리는 한국경제를 목도하고, 수렁에서 탈출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법무법인 광장 사무실에서 가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외환위기를 “작은 성공에 도취돼 큰 폭풍이 몰아치는 걸 몰랐던 결과였다”고 회고했다. 그가 보는 국제금융시장은 여전히 적과 동지가 불분명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면 곧장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살벌한 전장이다. 그는 “남이 우리를 절대 지켜주진 않는다”며 “자만하지 말고 ‘자강자고’(自强自固ㆍ스스로 강해지고 단단해짐)해야 한다는 게 외환위기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라고 강조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는 큰 변화를 겪었다. 가장 긍정적인 변화를 꼽는다면.

“무엇보다 정부와 기업, 금융사 모두 위험에 대한 인식이 확실해졌다. 금융사는 여신건전성, 정부는 외채관리에 늘 신경을 쓴다. 기업경영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가깝게 바뀌었다.”

-부정적 변화도 적지 않다. 양극화 심화가 대표적인데, 요즘은 “경제가 발전하면 뭐하나, 내게 돌아오는 게 없는데”라는 국민들의 소외감도 더 커지는 것 같다.

“양극화는 우리만의 현상은 아니다. 꼭 위기의 후유증만으로 볼 수도 없다. 1980년대부터 경쟁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에 전파된 후 승자가 과실의 대부분을 독식하는 불균형이 커졌다. 특히 우리는 외환위기 이후 정규-비정규직, 수출-내수기업, 대-중소기업 같은 강자와 약자 사이 소득격차가 더 심해졌다. 이는 앞으로 첨단산업 발전, 기계의 인간노동 대체 등으로 더 심화할 것이다. 분배ㆍ복지 정책으로 보완하지 않으면 심각한 사회 갈등으로 터질 수밖에 없다.”

-외환위기 때로 돌아가 보자. 97년 말 원ㆍ달러환율은 달러당 1,995원까지 갔다. 다시 이런 환율이 가능한가.

“오지 않는다고 단언할 순 없다. 환율엔 경제뿐 아니라 정치 요인도 작용한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평온했던 2008년 글로벌위기 때도 환율은 1,560원대까지 올랐다. 우리처럼 ‘비교환성’ 통화를 쓰는 나라는 그래서 늘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부터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96~98년)으로 경제 상황을 실시간 점검했다. 만약 지금의 경험을 갖고 그 때로 돌아간다면 위기를 막을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거대한 댐이 노후해 여기저기서 무너지는 걸 한 두 사람의 힘으로 막기는 어렵다. 외환위기의 직접 원인은 ‘단기 외화유동성 관리 실패’지만, 돌이켜보면 갑자기 덩치만 커진 고등학생이 세상물정 모르고 사회에 나섰다가 당한 셈이기도 하다.”

-그래도 현명한 누군가가 있었다면 정책 오판은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도 없잖다.

“무엇보다 공무원의 전문성과 수준이 높아야 한다. 당시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은 6개월도 안 돼 바뀌곤 했다. 국제 흐름도 모르고 네트워크도 없었다. 정부가 바뀌어도 경제를 운용하는 핵심 분야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경제부총리나 금융위원장은 그래서 정치논리보다 전문성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본다.”

-미셸 캉드쉬 전 IMF 총재는 한국의 외환위기를 ‘위장된 축복’이라 일컬었다. 동의하나.

“전체를 놓고 손익계산을 하자면 구조개선처럼 얻은 것도 있으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한 사람들 입장에선 엄청난 충격과 고통이었다. 절대 그런 상황을 다시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 책임은 지도자와 정부에 있다.”

-말 못했던 비화도 많았을텐데.

“청와대에 근무할 때였다. 국가부도 사태를 막기 위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5차례에 걸쳐 미국(빌 클린턴), 일본(하시모토 류타로) 정상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야말로 ‘읍소’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민감하고 수치스런 내용까지 일일이 밝힐 순 없지만 우리에겐 정말 치욕이었다. 당시 통화록을 2년 전 대통령기록관에 넘겼다.”

-일본이 당시 우리의 급박한 자금지원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위기가 와도 일본은 우리를 외면할 것으로 보는가.

“냉정하게 말해 당시나 지금이나 일본은 돈을 주고 싶어도 못 준다. 국제적인 위기가 터지면 소방수는 국제통화기금(IMF)이고 IMF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다. 미국 재무부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게 국제금융의 냉엄한 현실이다.”

-97년 위기를 ‘외환위기’라 부른다. 20년간 외환 관련 지표는 월등히 좋아졌는데 우리에게 다시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고 보나.

“자본주의의 역사를 돌아보면 요즘 금융위기는 5~10년 단위로 반복된다. 인간의 탐욕과 망각 때문이다. 다만 한번 당하고 대비해 온 만큼 다시 올 위기는 외환위기의 형태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위기를 염려하는가.

“고용과 내수 부진, 인재 해외유출, 인구감소, 잠재성장률 하락, 과잉유동성에 따른 부채누적, 산업 구조조정 지연 등 숱한 구조적 문제가 우리 앞에 쌓여 있다. 여기에 통화긴축이 지속돼 미국의 금리가 3%대에 이르면 국내 금리는 더 상승할 것이다. 이 경우 가계와 기업 부문의 대규모 부실을 일으켜 2019년 이후 복합적인 위기상황을 맞을 수 있다. 다음 위기는 과거보다 훨씬 빠르고 심각할 것이다. ‘디플레이션→급격한 부채축소→디플레이션’이 반복되는 일본식 장기침체를 배제할 수 없다.”

-우리에게 어떤 대비가 필요한가.

“위기엔 ‘유능한 외과의’보다 ‘훌륭한 예방의’가 훨씬 낫다. 과거 한강의 기적, 고도성장 같은 훈장은 지난 20년간 민주화, IMF 사태, 신자유주의 등의 다리를 건너며 모두 강물에 빠뜨려 버렸다. 이제 정부 주도의 ‘요소 투입식’ 성장모델, 원천기술 없는 ‘따라하기식 카피 경제’, 국가 목표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압박하는 ‘잔 다르크식 성장모델’은 통하지 않는다. 불균형 경제구조를 이제라도 균형성장 모델로 바꿔나가야 한다.”

-균형성장 모델이란 뭘 의미하나.

“우리 경제는 여전히 수출, 대기업, 제조업 위주다. 이들의 발목을 잡자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내수, 중소기업, 서비스업 등 뒤처진 분야를 지원해 키워야 한다. 시장경제 선진국에서조차 더 이상 성장과 분배는 다른 목표가 아니다. 앞으론 소수의 능력자와 다수의 보통사람이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 사이 갈등을 줄이려면 분배ㆍ복지 정책 밖에 없다. 경쟁과 효율성만 강조하다간 사회 구조와 안전성이 취약해지고, 결국 그 피해는 모두에게 돌아갈 것이다.” 김용식 기자 jawohl@hankookilbo.com

◆김용덕 전 금감위원장은

1996~2003년 청와대 경제수석실 선임행정관,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 국제담당 차관보 등을 지내며 정부 내에서 외환위기 진행과 극복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한 외환위기의 산 증인이다. 이후 자유변동환율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환투기 세력의 공격에 맞서 정부의 외환시장 구두개입을 도맡으며 국제금융시장에서 ‘미스터 원’(Mr. Won)이란 별명을 얻었다. 1950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용산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74년 행시 15회로 공직에 입문, 옛 재무부와 재경부에서 국제금융 등 업무를 맡았다. 2003년 관세청장, 2005년 건설교통부 차관을 거쳐 2007년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을 지냈다. 2009년부터 고려대 경영대 초빙교수와 법무법인 광장 고문으로 일하다 최근 53대 손해보험협회장에 선출됐다.

외환위기 당시 김용덕 당시 재정경제부 국제담당 차관보를 '미스터 원'으로 표현한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류효진 기자
외환위기 당시 김용덕 당시 재정경제부 국제담당 차관보를 '미스터 원'으로 표현한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류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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