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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검침원, 가장 중요한 능력은 '잘 참기'?

입력
2017.05.01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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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평창동의 한 골목에서 가스검침원 장혜경씨가 계량기를 확인하기 위해 벽 사이를 올라가고 있다. 신혜정 기자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평창동의 한 골목에서 가스검침원 장혜경씨가 계량기를 확인하기 위해 벽 사이를 올라가고 있다. 신혜정 기자

“이 근처 화장실은 저 위에 편의점에 있어요. 아니면 아래 주민센터까지 내려가야 해요. 미리 다녀오실래요?”

지난달 28일 만난 검침원 장혜경(46)씨는 가스검침(가스 사용량 측정) 동행에 나선 기자에게 가장 먼저 용변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 평창동 평창문화로 인근에서 북한산 자락 높은 언덕 끝까지 올라가는 강행군을 하는 동안 화장실이 단 두 곳밖에 없다는 이유였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만큼, 초보자에겐 참기 힘든 여정이라고 했다.

장씨는 이날 오전 8시쯤 출근한 뒤 오후 3시까지 화장실을 딱 한번 갔다. 검침을 위해 방문한 가정에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을 사용한 게 전부다. 언덕이 많은 지역을 담당하는 장씨에게 하루 5~6시간 이상 용변을 참는 건 이젠 단련이 됐다. 공공화장실을 찾아 보기 힘든 곳에서만 오랫동안 근무해오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뱄다. 배탈이라도 나면 어쩔 수 없이 아래로 한참을 내려와 해결하곤 했지만 그렇게 되면 그날 일은 접어야 했다. 높은 언덕을 다시 오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검침원 장혜경씨가 가스 검침을 다닌 동선을 빨간색 선으로 지도 위에 표시했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공공ㆍ개방화장실은 주변에 6개뿐이며 이마저도 가깝지 않다. 자료제공 서울시 열린데이터광장. ▶ 지도바로가기

“오늘처럼 고객에게 부탁하는 게 아니면 편의점에서 열쇠를 받아서 화장실을 사용하는데 매번 미안해서 과자라도 하나씩 사게 되죠.” 하루 평균 3만보를 걷는 장씨에게 수분섭취는 필수. 하지만 화장실 때문에 억지로라도 물 마시는걸 자제한다고 말한다. 장씨는 “땀으로 배출되는 수분이 많아서 화장실에 덜 가게 되는 여름이 차라리 낫다”고 귀띔했다.

공공화장실 많아졌다는데 도통 보이질 않네

흔히 튼튼한 다리와 기름이 가득 찬 자동차가 이동노동자의 필수품이라고 생각되지만, 현장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능력은 생리현상을 찾아야 하는 ‘인내’다. 하루에도 수십 킬로미터씩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서 근처 화장실을 찾기란 쉽지 않아서다.

하루 6시간 이상 용변을 참는 건 장씨와 마찬가지이지만, 부산지역 대리기사 박정수(43)씨의 고충은 그와는 사뭇 다르다. 주변에 화장실은 많다는데 찾기도, 쓰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박씨가 주로 다니는 곳은 음식점이나 술집이 많은 번화가. 하지만 대리요청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동안 화장실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민센터 등 공공기관에 딸린 화장실은 업무시간이 지나면 문이 닫히는데다, 더 늦은 시간이 되면 웬만한 건물 개방화장실도 폐쇄하기 때문이다. 자정 이 넘으면 유일한 희망인 지하철 화장실도 문을 닫는다.

박씨는 대리기사로 일하던 초반엔 24시간 영업 카페의 화장실을 찾았다. 하지만 화장실 한번 가겠다고 5만원을 겨우 넘기는 하루벌이에 매번 4,000원짜리 커피를 사먹거나 공짜 화장실 이용을 부탁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포기했다. 박씨는 “부끄럽지만 정 참지 못하면 노상방뇨를 한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전용화장실을 갖고 다녔다는데 깨끗한 건 둘째치고 우리는 화장실이라도 쉽게 쓸 수 있으면 더할 게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오후 8시부터 오전 3시까지 대리기사 박정수씨가 부산 북구ㆍ동래구를 오가며 일한 동선. 파란선은 손님의 자동차를 운전한 동선, 빨간선은 다음 대리요청을 기다리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간 동선이다. 박씨의 동선 주변에 공공ㆍ개방화장실(파란점)이 많이 표시됐지만 정작 박씨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자료제공 부산시. ▶ 지도바로가기

여성 노동자들은 용변 외에도 생리라는 또 다른 고충에 시달린다. 이진선(44ㆍ가명)씨는 택배기사로 일하는 약 5년간 줄곧 피임약을 먹어왔다. 생리기간에 화장실을 찾다가 일이 늦어지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이씨는 “초보일 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왔는데도 피가 새서 트럭에서 나오질 못한 이후로 늘 이렇게 한다”고 말했다. 여성 가스검침원들 역시 화장실 문제로, 생리 기간엔 아예 출근을 하지 않고 나중에 몰아서 일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했다.

화장실 하나 더 생기는 것 보다 알리는 게 중요

현재 서울의 공공ㆍ개방화장실은 4,913개, 부산은 2,037개다. 숫자만 보면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집중된 공공화장실은 도시 외곽에서 일하는 장씨 같은 이동노동자들에겐 숨은그림찾기다. 더구나 유동인구와 비교해도 그 수는 많지 않다. 하루 유동인구 100만명에 달하는 강남역 반경 100m 에 위치한 공공ㆍ개방화장실은 역내 화장실을 포함해 8개뿐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주기적인 표본 점검과 함께 민간 건물에 관리비를 지급하면서 개방화장실 확대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있는 화장실을 사용자들에게 알리는 노력은 아쉽다. 서울시만이 ‘스마트서울맵’ 등 응용소프트웨어(앱)으로 화장실 위치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보행자용 안내판 설치 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시 관계자는 “예산문제상 화장실 안내판을 모든 곳에 다 설치하기는 어려워 주로 관광지 위주로 표시를 늘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화장실 접근성 강화 노력은 더해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유충렬 한국행정연구원 연구위원은 “개방화장실이라고 해도 열쇠로 잠가두거나 비밀번호를 달아 놓은 곳이 많은 상황에서 많은 이동노동자들이 난감할 수 밖에 없다”며 “화장실 수를 늘리는 것 보다 표시를 늘리거나 개방여부를 관리해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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