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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외면하는 수사기관] “피해자 카톡방 초대… 대화 나누며 공감대 쌓았죠”

입력
2017.08.19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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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월 간 전국 돌며 진술 모아

말 맞춘 공범들 연대 끊기 성공

"성범죄 피해 땐 꼭 증거 확보를"

범죄 피해자의 심정은 나 몰라라 하며 수사에 태만한 경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저하는 피해자를 설득해가며, 수년이 지난 사건의 범인을 끝내 잡아 내는 경찰도 있다. 서울 도봉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수사4팀은 6년 전 전남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의 범인들을 7개월 수사 끝에 검거했다. 공교롭게도 2011년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의 피의자 22명을 5년 만에 검거해 재판장에 세운, 바로 그 경찰서다.

6년 만에 성폭행범 검거해 구속시킨 도봉서 여성청소년과 수사4팀 형사들. 홍인기 기자
6년 만에 성폭행범 검거해 구속시킨 도봉서 여성청소년과 수사4팀 형사들. 홍인기 기자

피해자와 경찰 신뢰부터 쌓아야

2011년 8월 “아는 오빠들과 놀자”는 친구와 함께 모텔을 찾았다가 변을 당한 피해자 A(당시 18세)씨 사건은 앞서 고향에 있던 어머니가 112신고를 했는데도 수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피해자 본인이 경찰서를 직접 방문해야 한다”는 형식적인 답변에 어머니가 어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A씨는 고통을 벗지 못한 채 서울해바라기센터에서 상담을 받았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게 좋겠다는 말에 지난해 12월 집 관할 경찰서인 도봉서에 전화를 걸었다. 도봉서의 반응은 달랐다. 경찰의 적극적인 설득에 A씨는 당일 오후 바로 경찰서를 찾았다.

“최대한 빨리 경찰서로 나와 달라 했습니다. 처음 조사를 받겠다고 마음먹고도 망설이다 결국 경찰서를 오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죠. 일단 얼굴을 보고 구체적으로 얘기를 나눠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동현 수사4팀장(경위)은 “잊고 싶은 아픈 기억을 꺼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며 “그만큼 수사팀이 온힘을 다해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수년의 세월이 흘러 증거도 없고, 기억도 흐릿한 사건을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 범죄가 발생한 게 사실인지 여부부터 의심스럽기 마련이다. 특히 성범죄는 피해자들이 위축돼 있어 경찰이 처음 신고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성범죄 피해자들은 진술이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실제 겪은 일, 기억하는 것만 말해야 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말까지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수사를 개시해야 할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아도 면박을 줘서는 안 됩니다.”

수사팀은 A씨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내사 중 A씨가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고비를 넘긴 후 수사팀은 곧바로 카카오톡 대화방을 만들었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사건 이후 심리적으로 고통받고 약을 계속 복용해야 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 왔기 때문에 카톡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농담도 하면서 우리에게 기대도 된다는 믿음을 심어 주려 했죠. 팀원들과 같이 밥을 먹으면서 자연스레 사건 얘기도 하게 됐습니다.”

도봉서 여성청소년과 수사4팀은 피해자와 카카오톡 대화방을 만들어 많은 대화를 나누며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도봉서 여성청소년과 수사4팀은 피해자와 카카오톡 대화방을 만들어 많은 대화를 나누며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7개월 동안 전국 누비며 퍼즐 맞춰

A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수사팀은 수사를 시작했지만 증거는 사실상 없었다. A씨가 알려 준 단서는 사건 당일 A씨와 함께 현장에 갔던 친구 B씨의 존재 그리고 가해자 중 한 사람의 팔뚝에 잉어 문신이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사건 현장은 도봉서에서 400㎞ 이상 떨어진 전남의 A씨 고향. 차로 왕복 10시간 가까이 걸리는 곳이었다. 형사들은 주로 당직 근무 후 쉬는 날을 이용해 A씨 고향은 물론, 부산, 광주 등을 다니며 피해자의 친구, 현장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찾아 나섰고 여기서 확보한 진술로 퍼즐 맞추기를 이어 갔다.

친구 B씨는 자신은 모텔에 갔다 바로 나왔기 때문에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모른다면서도 “그곳에 동네 오빠 2명과 고교 남자 동창이 있었다”고 했다. 남자 동창 C씨는 “술이 깨서 화장실에 갔더니 (A씨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어서 골목길에 내려 놓았다”며 “모텔에 다른 남성 3명이 더 있었다”고 했다. 부산에서 만난 피의자 D씨의 지인은 E(25)씨가 화장실에서 여고생을 성폭행했다는 얘기를 D씨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D씨를 체포한 뒤 얼마 전 태어난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D씨는 친구 E씨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서로 말을 맞춰 범행을 부인하던 공범들의 연대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수사팀은 잉어 문신의 주인공이었던 E씨를 특수강간 혐의로 구속하고, 현장에 있던 나머지 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A씨는 현재 안정을 찾아 가고 있다. 경찰관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7개월 넘게 저희랑 대화를 나누면서 많이 가까워져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수사팀은 A씨의 앞날에 대해서도 적극 돕겠다는 입장이다.

성범죄 피해 땐 증거 확보부터

여성청소년 사건을 다루는 이 팀장은 최일선에서 범죄와 싸우는 경찰이 피해자의 입장에 공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도 피해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일단 고소하면 친고죄가 아니어서 없었던 일로 할 수 없는데도 뒤늦게 왜 취하가 안 되느냐고 항의하는 이들 때문에 난감한 적이 적지 않다는 것. 반대로 당장 고소하지 않더라도 나중을 대비해 증거가 될 만한 것은 꼭 챙겨 둬야 한다는 것이다.

무분별한 신고의 남발도 수사력을 낭비하는 일이다. “신고하는 분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막상 출동하면 꼭 112에 신고를 해야 했을까 싶은 행정 민원성 신고도 꽤 됩니다. 그런 현장에 출동하느라 정작 더 다급한 현장에 늦게 도착할 때면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죠.” 경찰청은 지난해부터 ‘범죄는 112, 재난은 119, 민원상담은 110(또는 120)’ 홍보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지난 한 해 112에 접수된 1,956만 7,000여 건 중 상담으로 인계한 45%를 빼도 현장 출동 건수가 1,100만 건에 달한다”며 “경찰도 현장 출동과 초기 대처의 부족한 부분을 계속 보완해 나가고 있지만 국민들도 어디에 신고해야 하는지 한 번 더 고민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상준 기자 butto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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