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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레닌그라드 봉쇄작전(9월 8일)

입력
2017.09.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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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이 즐비한 1942년 겨울 레닌그라드 거리. en.wikipedia.org
시신이 즐비한 1942년 겨울 레닌그라드 거리. en.wikipedia.org

1941년 9월 8일 독일군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봉쇄작전이 시작됐다. 인구 330만 명의 레닌그라드는 북쪽으로 핀란드군, 남쪽으로 독일군에 포위당한 채 겨울 혹한과 여름의 전염병, 기아와 폭격을 감당하며 무려 872일을 버텼다. 소련군 101만 7,000명이 사망ㆍ실종하거나 포로로 잡혔고, 241만 명이 부상 당했다. 민간인 사상자도 64만여 명에 달했다. 그게 공식집계지만, 실제로는 도시 인구 전체와 맞먹는 약 300만 명이 사망ㆍ실종 하거나 부상당했다는 설도 있다.

41년 6월 22일 침공을 시작한 나치 군대는 파죽지세로 연방 국가들을 유린하며 러시아 본토를 압박했다. 모스크바로 향한 중앙집단군과 키에프로 진군한 남부집단군, 그리고 레닌그라드의 북부집단군이었다. 서방 유럽의 관문인 레닌그라드는 소련 발트함대의 거점이자, 군수공업의 기지였고, 무엇보다 10월 혁명의 요람인 상징적 도시다. 소련으로선 모든 전선에서 고전했지만, 어느 한 곳도 포기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당연히 총력전 태세로 맞섰고, 북부집단군은 봉쇄작전으로 응수했다. 식량과 난방연료, 의약품 등 일체의 물자 반입과 군수품 반출을 차단함으로써 레닌그라드를 아예 지도에서 지우자는 전략. 독일은 시가전으로 입을 피해를 회피하면서 포격과 폭격으로 레닌그라드를 함락, 전력을 유지해 이후 다른 전선의 지원군으로 활약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레닌그라드 시민과 게오르기 주포크 총사령관 휘하 주둔군의 고난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루 빵 배급량 125g으로 버틴 날이 허다했다. 가죽 구두와 허리띠를 삶아 먹었고, 도배지에 붙은 풀을 긁어 수프를 끓이기도 했다. 시체의 인육을 먹는 이들까지 생겨나 군인들이 단속에 나서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군수공장은 가동됐고, 시민들에게는 임무가 부여됐다.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작곡한 쇼스타코비치는 소방대원이었다. 소련 최대 농작물 종자 및 표본 보관소였던 파블로프스크 실험국 과학자들은 굶어 죽어가면서도 종자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 사이 자잘한 공방은 이어졌다. 간신히 뚫린 포위망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식량과 물자가 오가고 피난민이 나오기도 했다. 얼음으로 뒤덮이는 도시 동북부의 라도가 호수를 시민들은 ‘생명 길’이라 불렀다. 포격과 침수의 위험에도 목숨을 걸고 화물트럭이 그 얼음호수 위를 오갔다. 44년 1월 27일 독일군이 퇴각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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