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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360˚] ‘야구의 신’ 김성근 야구는 끝났을까

입력
2017.05.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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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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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신’으로 불렸던 김성근(75ㆍ사진) 전 한화 이글스 감독이 유니폼을 벗었다.

한화 이글스는 지난 23일 “김 감독이 구단과 코칭스태프에게 사의를 표명했다”고 밝혔지만 김 감독 해임은 구단에서 먼저 제안했다는 게 야구계 안팎의 정설이다. 지난 2014년 가을, 7,000여명의 팬들이 ‘김성근 감독을 데려오라’는 인터넷 서명에 참여하고 일부는 한화그룹 본사에서 1인 시위를 할 정도로 김 감독에 대한 기대는 높았다. 2015년 부임 뒤 첫 시즌에서 한화는 2년 만에 3연전 경기를 모두 쓸어 담는 등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급기야 ‘중독성 있는 한화 야구’를 뜻하는 ‘마리한화’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하지만 지난 2년간 순위는 6,7위에 그쳤고, 김 전 감독은 선수 혹사와 지도력 논란에도 휩싸였다. 결국 김 전 감독은 지휘봉을 잡은 프로팀 7곳에서 모두 해임됐다는 불명예스러운 기록과 함께 그라운드를 떠났다.

야구하기 위해 한국 행 택한 재일교포 2세

야구선수시절 김성근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야구선수시절 김성근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 전 감독은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다. 공터만 있으면 아이들과 모여 야구를 했던 그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순탄한 길은 아니었다. 야구 명문고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일찍 떠나 보내고 늘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형편에선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학비가 저렴한 가쓰라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에도 야구부가 있었지만 상황은 열악했다. 당시 이 학교 고3학생들이 모두 졸업하면서 던질 만한 투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가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이유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른 새벽 우유와 신문배달을 마치고 늦은 밤까지 연습에 매진했다.

그랬던 그는 1959년 재일교포학생야구단으로 한국 방문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고교 졸업 이후 일본 사회인 야구팀에 있던 그가 국내 동아대학교로 스카우트 된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한국 프로야구에 몸을 담게 된 그는 1961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국가대표에 이어 실업팀인 기업은행 창단 멤버 등으로 활동했다. 한국 야구에 대한 열정을 키운 그는 1964년 가족들과의 생이별을 각오하고 한국으로 영주귀국을 택했다. 잘 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김성근의 야구’를 평가해 준 한국에서 공을 던져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과욕이 화를 불렀다. 지나친 연습으로 어깨 부상을 당한 그는 1969년 27세라는 이른 나이에 현역 은퇴의 길을 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최연소 감독 김성근’이란 또 다른 야구인생으로 들어섰다.

태평양 돌핀스, SK 와이번스, 고양 원더스

김성근 전 태평양 돌핀스 감독이 허정욱(왼쪽) 투수에게 훈련을 지도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성근 전 태평양 돌핀스 감독이 허정욱(왼쪽) 투수에게 훈련을 지도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는 ‘꼴지를 일등으로 만드는 감독’이라는 타이틀도 따라붙었다. 말 그대로 꼴지 팀을 1등으로 만들지 못했지만 부진한 성적으로 하위권을 맴돌던 팀들을 강팀으로 탈바꿈시키는 그의 용병술에서 비롯된 별명이다.

시작은 태평양 돌핀스였다. 1989년 그가 부임한 뒤 당시 만년 꼴찌로 찍혀있던 돌핀스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 해 정규시즌에서 3위 오른 돌핀스는 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정규리그가 끝난 뒤 최종 우승팀을 가리기 위해 벌이는 경기)에 진출했다. 무명의 신인 투수 3인방(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을 개인 기량에 맞춘 엄청난 양의 훈련으로 국내 프로야구의 간판 투수로 올려놓으면서 가져온 성과였다. 1996년 지휘봉을 잡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91년부터 1군 정규리그에 참가했지만 매년 하위권을 떠돌았던 레이더스는 그가 부임한 이후 2년 연속 정규시즌 3위를 기록한다.

그의 전성기는 2007년 부임한 SK와이번스 시절이다. 2006년 시즌 6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뒀던 와이번스는 이듬해 그를 만나고 정규시즌 1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와이번스 창단 첫 우승이자 김 감독의 프로 감독 재임 후 첫 우승이었다. 이후 김 감독이 구단과의 마찰로 2011년 해임되기까지 4년간 와이번스는 한국시리즈 우승 3번, 준우승 1번의 기록을 세웠다.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2010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4차전 삼성-SK경기에서 승리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SK와이번스 선수들이 김성근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연합뉴스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2010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4차전 삼성-SK경기에서 승리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SK와이번스 선수들이 김성근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연합뉴스

그의 이런 성과는 두 가지의 철저한 원칙에서 비롯됐다. 첫째는 ‘더럽든 지저분하든 이겨야 한다’였다. “스포츠는 이기는 것이 목적이고, 고생 해서 이룬 성과를 즐기는 것이 야구의 재미”란 게 그의 지론이다. 이기기 위해 가능한 모든 선수들을 등판시키는 ‘벌떼야구’가 그의 전매특허가 된 이유였다. ‘재미가 없다’ ‘승부에만 집착한다’는 비난도 따라왔지만 그는 기꺼이 감수했다. 시합이나 연습 상황을 선수별로 깨알같이 적어 분석하는 김 감독 특유의 ‘데이터야구’ 역시 승리를 향한 집념이다.

두 번째 철칙은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다’였다. 그는 “사람의 잠재능력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한다. 50의 능력치를 가진 선수를 잘 훈련하면 100, 200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골자다. 그의 이런 생각은 혹사 논란을 일으킨 ‘지옥훈련을 통한 체질개선’으로 이어졌다. 현재 KT위즈 소속의 이진영 선수는 “SK와이번스 시절 일본 고치현 바닷가에서 동계훈련을 하던 중 너무 힘들어 부러진 방망이들로 뗏목을 만들어 도망을 가는 상상까지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성근 전 감독이 지난 2014년 경기도 고양시 국가대표 야구훈련장에서 열린 고양원더스 선수단 미팅에서 팀 해체 결정을 알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고양=연합뉴스
김성근 전 감독이 지난 2014년 경기도 고양시 국가대표 야구훈련장에서 열린 고양원더스 선수단 미팅에서 팀 해체 결정을 알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고양=연합뉴스

김 전 감독은 훈련이 ‘선수에 대한 최상의 애정표현’이라 생각한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인 ‘잠자리눈깔’은 선수들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파악해 개개인에 맞는 훈련을 시킨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때문에 선수들 중엔 그의 혹독함을 고마워 하는 사람도 있다. SK와이번즈의 최정 선수는 김 감독과의 훈련에 대해 “감독님과 훈련하고 나면 완전히 탈진해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지만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비로소 제대로 배우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은퇴한 신윤호 투수는 “감독님 만나기 전까지 나는 죽은 나무였다”며 “그 나무에 물을 주고 가꾸고 살려놓은 감독님 덕분에 야구판에 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라고 말했다.

그의 이런 철학은 2012년 한국 최초의 독립 야구단인 고양원더스의 감독 부임과 함께 빛을 냈다. 원더스는 프로구단에 입단하지 못하고 야구를 포기했던 선수들을 모아 ‘패자부활전’을 꿈꾼 팀이다. 김 감독은 ‘훈련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신조로 고강도의 훈련을 실행했다. 비록 경영난으로 3년만에 해체됐지만, 원더스를 거친 선수 30여명이 프로구단에 입단했다.

‘감독은 아버지다’ vs ‘꼰대 야구’

그는 언제나 ‘감독은 선수들에게 아버지다’고 강조한다. 김 감독은 자식이 넘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나도록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감독 역시 선수들이 혼자 스스로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단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선수들에게 천 개가 넘는 펑고(수비연습을 위해 배트로 공을 쳐 주는 것)를 직접 쳐 주는 것도, ‘사적인 정이 생기면 정신력이 약해진다’며 선수들과 밥을 같이 먹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의 ‘권위주의적 부성애’는 그러나 2015년 한화이글스 부임 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야신이 한화에 승리를 가져다 줄 것’ 이라는 팬들의 강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김 감독이 들고 나왔던 건 역시 ‘체질개선’이었다. 일본 최고의 타자 스즈키 이치로가 초등학교 시절 매일 2,000개의 특별타격훈련을 했다는 것을 예로 들며 ‘고생을 넘으면 성공’이라는 자신의 지론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러나 김 감독의 전략은 통하지 않았다. 그는 주력 투수들을 끊임없이 기용하는 방식으로 난국을 극복하려 했다. 결국 부담이 가중되면서 김민우 선수는 어깨부상으로, 권혁이 팔꿈치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했다. 선수들의 ‘혹사’가 김 감독에 의해 ‘투혼’으로 포장됐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여기에 빈볼(고의로 머리를 향해 던지는 공)과 사인 훔치기 등 비신사적 작전, 베테랑 선수 영입에 치중해 유망주를 내보내는 결정 등까지 겹치면서 도마에 올랐다. ‘아버지’의 이면에는 선수의 건강ㆍ자존심보다 승리를 중시하는 과도한 성과주의가 숨어있었다는 비난에서였다. 많은 팬들은 ‘김성근의 야구는 끝나야 한다’ 고 외쳤고 그는 한화 유니폼을 벗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졌다.

지난 2013년 당시 김성근 고양원더스 감독이 한국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지난 2013년 당시 김성근 고양원더스 감독이 한국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목표 달성을 위해 매진한다’ 김 감독이 청와대, 대기업 임원 등의 초청을 받아 리더십 강연을 할 때마다 강조한 덕목이다. 비난이 쏟아져도 타협하지 거침없이 달려온 ‘김성근식 야구’는 적어도 한화에서는 끝이 났다. 하지만 노장의 좌우명은 '일구이무(一球二無·선수에게 두 번째 공은 없다)' 다. “단 한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철저히 다음을 준비한다”는 그의 야구가 정말 막을 내린 것인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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