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연기만 잘하면 됐지.”
충무로 유명 배우 A는 한때 주사로 악명이 높았다. 술이 조금만 들어가도 주위 사람에게 괜히 시비 붙거나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소문이 종종 들렸다. 영화인들이 적지 않게 모인 한 술자리에서는 식탁을 엎기도 했다고 한다. 함께 자리를 했던 몇몇이 스타의 횡포에 씩씩거리자 한 중견 감독이 저 앞의 발언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연기 잘하면 더 난리 쳐도 돼.”
배우가 연기를 잘해 영화 완성도를 높여주면 감독으로선 고마울 뿐이고, 배우 덕분에 흥행이 잘 되면 제작사와 투자사는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니 연기 잘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배우가 술상 좀 뒤집어 엎었기로서니 뭐 대수냐라는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안도현 시인의 유명 시 ‘너에게 묻는다’를 빌려 표현하면 ‘그 배우 함부로 욕하지 마라. 너는 제작자에게 한번이라도 돈 벌어준 사람이었느냐’라는 식의 심정이라고 할까.
“배우가 연기만 잘하면 됐지”라는 단언은 묘하게도 설득력이 있었다.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킬 수준의 ‘주폭’이 아니라면 스타 배우의 술버릇을 탓할 근거도 미약했다. 딱히 친밀한 교유를 기대할 만한 인물도 아니니 그저 영화를 즐기며 그 사람의 연기를 평가하면 된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A가 있는 술자리에 몇 차례 끼게 됐을 때는 마음이 달랐다. 술이 한 순배만 돌아도 불콰해지는 그는 ‘한 마리 위험한 짐승’이었다. 언제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고는 했다. A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난감한 상황을 공감할 수 있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더니. 폭력이 눈앞에 어른거리니, 당사자들의 애로를 깨달았다.
문화계 ‘미투(#Me Too)’ 운동을 지켜보며 잊고 지냈던 A에 대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랬고, 어쩔 수 없었다’는 방관 또는 무력감, ‘나랑 가까이 지낼 사람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자’는 무심함이 문화계에 ‘성폭력 괴물’을 키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감독이 영화만 잘 만들면 됐지”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상 타면 좋은 감독” “폭력적이라도 연극 잘 만들면 거장 연출가”라는 어줍잖은 실용주의적 태도와 성과우선주의 시각이 문화계 사람들과 언론의 눈을 가렸다.
성폭력이 발생해도 피해자가 아니면 크게 관심을 두기 어렵다. 제3자는 안타까움을 표할 수는 있어도 당사자만큼 절실할 수 없다. 미투 폭로에 나선 피해자는 벌판에 홀로선 기분일 것이다. ‘연대의 제도화’가 필요한 이유다. 피해자 누구든 돈이라는 실탄이 있어야 법정이라는 전쟁터에서 가해자와 싸울 수 있을 테니까.
지난달 할리우드에서 출범한 성폭력 추방 운동 단체 타임스업(Time’s Up)은 그래서 눈여겨볼 만하다. 성폭력을 당한 영화〮TV업계 종사자들을 우선적으로 돕기 위해 만들어진 이 단체는 스타들과 연예기업들의 관심 속에서 출발을 알렸다. 배우 제니퍼 애니스턴과 샌드라 불럭, 가수 설리나 고메즈 등이 타임스업을 위해 지갑을 연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적인 매니지먼트회사 CAA는 200만달러, WME와 ICM은 100만달러씩을 기부했다. 그렇게 해서 단숨에 2,100만달러가 모였다. 타임스업은 이 돈을 바탕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을 법적으로 도우려 한다. 영화〮TV업계라는 분야, 여성이라는 성별을 뛰어넘어 각 분야 급여 노동자를 수혜 대상으로 하겠다는 큰 목표도 지니고 있다.
국내에서도 영화진흥위원회와 여성영화인모임을 중심으로 지난달 12일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을 개소했다. 업계 성폭력 피해자가 변호사 상담 등을 받도록 지원하겠다지만 쓸 돈이 거의 없다. 올해 배정된 예산은 9,400만원. 그나마 6,000만원 가량은 실태조사를 위해 이미 썼다. 여성영화인모임은 후원회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SM엔터테인먼트나 CJ엔터테인먼트 등 연예업계 큰 손이나 스타들이 거든다면 발걸음이 좀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배울 것은 좀 배우자.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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