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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미투'이후... 타임스업에서 배우자

입력
2018.04.03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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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스업' 핀을 꽂은 배우 패트릭 스튜어트(왼쪽), 서니 오젤 부부가 지난달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0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로스앤젤레스=로이터 연합뉴스
'타임스업' 핀을 꽂은 배우 패트릭 스튜어트(왼쪽), 서니 오젤 부부가 지난달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0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로스앤젤레스=로이터 연합뉴스

“괜찮아. 연기만 잘하면 됐지.”

충무로 유명 배우 A는 한때 주사로 악명이 높았다. 술이 조금만 들어가도 주위 사람에게 괜히 시비 붙거나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소문이 종종 들렸다. 영화인들이 적지 않게 모인 한 술자리에서는 식탁을 엎기도 했다고 한다. 함께 자리를 했던 몇몇이 스타의 횡포에 씩씩거리자 한 중견 감독이 저 앞의 발언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연기 잘하면 더 난리 쳐도 돼.”

배우가 연기를 잘해 영화 완성도를 높여주면 감독으로선 고마울 뿐이고, 배우 덕분에 흥행이 잘 되면 제작사와 투자사는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니 연기 잘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배우가 술상 좀 뒤집어 엎었기로서니 뭐 대수냐라는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안도현 시인의 유명 시 ‘너에게 묻는다’를 빌려 표현하면 ‘그 배우 함부로 욕하지 마라. 너는 제작자에게 한번이라도 돈 벌어준 사람이었느냐’라는 식의 심정이라고 할까.

“배우가 연기만 잘하면 됐지”라는 단언은 묘하게도 설득력이 있었다.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킬 수준의 ‘주폭’이 아니라면 스타 배우의 술버릇을 탓할 근거도 미약했다. 딱히 친밀한 교유를 기대할 만한 인물도 아니니 그저 영화를 즐기며 그 사람의 연기를 평가하면 된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A가 있는 술자리에 몇 차례 끼게 됐을 때는 마음이 달랐다. 술이 한 순배만 돌아도 불콰해지는 그는 ‘한 마리 위험한 짐승’이었다. 언제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고는 했다. A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난감한 상황을 공감할 수 있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더니. 폭력이 눈앞에 어른거리니, 당사자들의 애로를 깨달았다.

문화계 ‘미투(#Me Too)’ 운동을 지켜보며 잊고 지냈던 A에 대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랬고, 어쩔 수 없었다’는 방관 또는 무력감, ‘나랑 가까이 지낼 사람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자’는 무심함이 문화계에 ‘성폭력 괴물’을 키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감독이 영화만 잘 만들면 됐지”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상 타면 좋은 감독” “폭력적이라도 연극 잘 만들면 거장 연출가”라는 어줍잖은 실용주의적 태도와 성과우선주의 시각이 문화계 사람들과 언론의 눈을 가렸다.

성폭력이 발생해도 피해자가 아니면 크게 관심을 두기 어렵다. 제3자는 안타까움을 표할 수는 있어도 당사자만큼 절실할 수 없다. 미투 폭로에 나선 피해자는 벌판에 홀로선 기분일 것이다. ‘연대의 제도화’가 필요한 이유다. 피해자 누구든 돈이라는 실탄이 있어야 법정이라는 전쟁터에서 가해자와 싸울 수 있을 테니까.

지난달 할리우드에서 출범한 성폭력 추방 운동 단체 타임스업(Time’s Up)은 그래서 눈여겨볼 만하다. 성폭력을 당한 영화〮TV업계 종사자들을 우선적으로 돕기 위해 만들어진 이 단체는 스타들과 연예기업들의 관심 속에서 출발을 알렸다. 배우 제니퍼 애니스턴과 샌드라 불럭, 가수 설리나 고메즈 등이 타임스업을 위해 지갑을 연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적인 매니지먼트회사 CAA는 200만달러, WME와 ICM은 100만달러씩을 기부했다. 그렇게 해서 단숨에 2,100만달러가 모였다. 타임스업은 이 돈을 바탕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을 법적으로 도우려 한다. 영화〮TV업계라는 분야, 여성이라는 성별을 뛰어넘어 각 분야 급여 노동자를 수혜 대상으로 하겠다는 큰 목표도 지니고 있다.

국내에서도 영화진흥위원회와 여성영화인모임을 중심으로 지난달 12일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을 개소했다. 업계 성폭력 피해자가 변호사 상담 등을 받도록 지원하겠다지만 쓸 돈이 거의 없다. 올해 배정된 예산은 9,400만원. 그나마 6,000만원 가량은 실태조사를 위해 이미 썼다. 여성영화인모임은 후원회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SM엔터테인먼트나 CJ엔터테인먼트 등 연예업계 큰 손이나 스타들이 거든다면 발걸음이 좀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배울 것은 좀 배우자.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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