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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낙화유수

입력
2017.04.1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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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갈 일 있으면 저를 부르세요. 아버지 운전하게 하시지 말고. 어머니와 일상적 통화를 하고 끊기 전에 내가 인사말처럼 늘 하는 말이다. 물론 어머니는 멀리 갈 일이 있거나 아버지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에 가야 할 때만 나를 부른다. 나도 그런 줄 이미 알고 있고 어머니도 내가 알고 있음을 안다. 어디 갈 일 있으면 꼭 나를 부르라는 말은 왠지 미안해서 하는 당부이고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말이다.

며칠 전 어머니가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야 할 일이 있었다. 그날따라 봄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병원에 가기 전,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동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머니는 그 집 순댓국이 맛있어서, 오래 전부터 나에게 꼭 사주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비도 오는데 넷째 딸이 오기를 잘 하지 않았느냐고, 아버지가 운전 안 하셔도 되니까, 하면서 생색을 냈다. 그러자 어머니가 복잡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오늘 아침에도 네 아빠 운전시켜서 바로 요 앞 세탁소 갔다 왔어. 이불 빨래 맡기려고. 그런데 네 아빠가 갑자기 그러는 거야. 우리 아침도 안 먹었는데 저 집에 가서 순댓국 먹고 가자고. 아침으로 과일과 빵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나온 길이었는데 말이야. 나는 조금 놀라서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무덤덤한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짐짓 큰 소리로 웃으면서 아버지를 보고 말했다. 어머나. 우리 아빠가 이제는 아침 먹은 것을 기억 못하는 사람이 된 거에요? 아버지는 나를 마주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 지금 네 옆에 앉아 있는 저 모자 쓴 여자는 누구냐? 어머니가 당황해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얘, 네 아빠가 농담하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알아요, 알아요, 엄마.

순댓국을 먹으며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예전의 아버지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만그만한 나이의 어린 딸들이 현관 앞에 나란히 서서 출근하는 아버지를 향해 큰 소리로 인사를 해도, 단 한 번도 뒤 돌아 보거나 고개를 끄덕인 적 없던 아버지. 길을 걸을 때도 딸들이 손을 잡거나 매달리면 질색하며 뿌리치던 아버지. 둘러앉은 저녁 밥상 앞에서 일 년에 한두 번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네가 지금 몇 학년이지? 라고 묻던 아버지. 우리 세대의 아버지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늘 바쁘고 엄하고 무뚝뚝했던 아버지. 언젠가 술을 많이 하시고 귀가한 날, 아버지는 잠들어 있는 딸들을 깨워 당신 뺨에 뽀뽀를 하라고 강요하면서,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을 했다. 아직 너무 어렸던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성가시기만 했던 껄끄러운 뺨과 술 냄새의 기억.

순하고 텅 빈 눈빛으로 수줍은 듯 미소를 띠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보고 있노라니, 그 모든 일들이 과연 정말 있었던 일인지 내 기억이 정확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기대가 크면 오해도 커지는 법. 냉담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내가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던 오랜 세월 내내, 아버지는 그저 서툴고 게을렀을 뿐,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에 짓눌리고 험한 세파에 시달리던 온순하고 겁 많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봄비에 떨어지기 시작한 연분홍 꽃잎들이 순댓국 집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한 때는 가지마다 젊은 날의 꿈처럼 피어나던 꽃송이들이 그렇게 서둘러 생을 마감하고 있는 중이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은, 한 번 생겨난 것들은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이치라고 들었다. 새로 태어나는 것들이 벅차서 아름답듯, 사라지는 것들은, 떠나는 것들은, 애달파서 아름답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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