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윤주 기자

등록 : 2018.04.12 04:40
수정 : 2018.04.12 09:36

“생로병사에 모두 보낼 수 있어… 꽃은 소통채널이죠”

이색 꽃집 ‘수다 F.A.T’ 손은정씨

등록 : 2018.04.12 04:40
수정 : 2018.04.12 09:36

꽃꽂이 통해 인물 성향을 분석

리더십 개발하는 워크숍 진행

계절 별로 꽃ㆍ책 묶어 택배 판매

수익금은 사회적 약자에 기부

“꽃이 시드는 과정을 보면서

지금이 화양연화라고 느껴요”

그림 1손은정 수대 F.A.T 대표는 “꽃은 잠깐의 기쁨을 주는 걸로 자기소임을 다 한 것”이라며 “생화 보존 기간을 늘리기 위해 설탕물 쓰지 말고, 꽃 질 때까지 주어진 찰나를 즐기라”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서울 옥수동의 꽃집 ‘수다 F.A.T’는 여느 꽃가게와는 확연히 다르다. 전철역 바로 옆 건물 3층에 있는데다 제대로 된 간판도 없어 동네주민도 이런 곳에 꽃집이 있는지 모를 정도.꽃 냉장고는 물론 생화 유지제도 쓰지 않는 주인은 “꽃집은 재고 관리, 수요 예측 안 되는 대표적인 사업”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 곳의 특화 상품은 유명 북마스터, 플로리스트가 시기별로 추천하는 꽃과 책을 3만~4만원대에 택배로 발송하는 서비스 ‘북스 앤 플라워즈’. 주변에서 “(꽃만큼 안 팔리는 책을 묶어) 더블 범(폭탄)”이라 놀려도, 주인장은 일정 시기가 지나면 꿋꿋하게 절판시킨다. 수익금은 근육장애인 소모임 ‘청년 디딤돌’, 이주노동자들에게 공연을 제공하는 모임 ‘국경 없는 음악회’에 꽃을 보내는 데 쓴다.

최근 수다 F.A.T에서 만난 손은정(41) 대표는 “꽃집 하면서 제가 이 순간만 산다는 걸 매번 확인한다. 꽃이 시드는 과정을 보면서 지금이 제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ㆍ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라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물론 돈 버는 사업을 따로 한다. 꽃꽂이를 통해 인물의 성향을 분석, 리더십을 개발하는 워크숍 프로그램이다. 유명 대기업, 로펌 등의 종사자 1,700여명이 손 대표의 ‘진단’을 받았다. 꽃(Flower)과 예술(Art), 기술(Technology)을 접목시킨 꽃집 이름(F.A.T)처럼 종종 기술과 꽃을 접목시킨 전시회도 연다.

손 대표가 꽃집을 열게 된 사연을 알게 되면 화양연화라는 말이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의 전직은 IT기업 마케터. 연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다국적 정보기술회사 시스코코리아에 엔지니어로 입사한 그는 LG전자 프랑스법인, 인모비코리아 등에서 10여년간 근무했다. “집도 나오고 차고 나오는 프로그램”으로 시스코 본사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수를 받은 게 2001년. 좋은 기회였지만, 마음에 걸리는 사안이 있었으니 아버지가 말기암에 걸렸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굉장히 단호한 분이었어요. 무엇이든 최선을 다 하고 아니다 싶을 때는 딱 내려놓는 스타일이라 말기암이라는 걸 알면 항암치료를 포기할 거라 생각했죠. 어머니랑 상의해 암 초기라고 말하고 저는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시간을 돌이켜 다시 그 상황이 되면 솔직하게 말했을까 의문이지만 적어도 제가 미국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얼마 후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된 아버지는 예상처럼 “누군가에게 의지해 사는 건 의미 없다”며 항암치료를 거부했고, 가족에게 “딱 닷새만 고생하라”면서 곡기를 끊었다. 소식을 들은 손 대표가 한국행 티켓을 예매할 때, 마음을 또 잡는 게 있었으니 자격증 시험이었다. 딸 넷에 장녀로 아들처럼 자랐던 손 대표는 “아빠의 꿈”이었고 “목표 하나씩 이뤄내면 그게 그에게, 저에게 보상”이었다. “그래서 (가족한테) 출발한다고 말한 날에 자격증 시험치고, 그 다음 날 떠난 거예요. 합격하고 가면 아빠가 좋아할 거 같아서. 저 보고 싶다고 마지막에 연명치료 결정하셨는데 17시간 치료하다 (제가) 공항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제가 면세점에서 화장품 고르는 동안 어떤 사람은 사력을 다해 인생을 정리한 거죠.”

손은정 대표는 몇 해 전 말기암 환우를 돕는 비영리민간단체 ‘선물공장 프로젝트’를 운영하다 올해 초 카이스트에서 사회적기업에 관한 MBA를 받았다. "MBA를 하는 동안 살면서 처음 꼴지를 해봤다"고 환하게 웃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손 대표는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된 하루였지만, 금방 인생을 바꾸진 못했다”고 말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려올 생각을 못한 거죠. 정신없이 장례식 치르고,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엔지니어로) 기술 배웠으니 전략파트 지원했고, 이후에 영업 배우려고 마케팅을 자원했죠. 제가 우울증이 있다는 건 회사 옮기고 알았어요.”

2010년 무렵 LG전자 프랑스 법인에서 근무하며 꽃 장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꽃을 주고받으며 달뜨는 프랑스 사람들이 신기해 “왜 저럴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생로병사를 다 커버하는 선물이 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사람이 태어났을 때, 죽었을 때, 기쁠 때, 슬플 때 전부 꽃을 보내잖아요. 이럴 때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뭔가를 배워보면 사는 게 이렇게 허무하지 않겠지 싶어 꽃을 배웠죠.”

꽃을 예쁜 장식품이 아닌 소통 채널로 여기다 보니 여느 플로리스트와는 접근법이 달랐다. “초기에 공대 동창들한테 꽃 꽂아보라고 했더니, 꽃바구니에 회사 조직도를 그리고 있는 거예요. 여성은 유행하는 패턴, 꽃 가격 같은 걸 생각하면서 꽂는데 남성은 사전 정보가 별로 없으니 자기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죠.” 꽃 장식을 배우면서 꽃을 통해 마음 치유하는 원예심리학을 공부했고, 기업 워크숍 강연을 하면서 직종, 기업별 특징도 파악했다. 대기업 관리자는 큰 꽃을 중심에 작은 꽃을 그 아래에 꽂는 반면 벤처기업 CEO의 경우 ‘외롭고 하늘하늘한 꽃’을 꼭 하나씩 꽂아둔다고. 1,700여명의 워크숍을 진행한 손 대표는 꽃꽂이의 높이, 밀도, 색의 다양성, 꽃 꽂는 시간 등 8가지 항목으로 나눠 직군, 기업별 특징을 모아 조만간 논문을 쓸 계획이다.

창업 후 수익은 아직 5년 전 받았던 월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손 대표는 꽃집 차린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람은 죽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해요. 죽을 때 어떤 모습으로 죽고 싶은지 생각해보면 삶에서 큰 결정을 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죠.”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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